SF걸작 '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 형제 감독이 각본을 쓴 SF액션 '브이 포 벤데타'(감독 제임스 맥티그)는 매트릭스의 '가까운'미래 버전이다. 먼 미래 고도의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지배했던 '매트릭스'의 세계와 달리 가상의 3차 세계대전 후 극소수 인간이 대다수 국민을 철권통치하는 국가에서 인권과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그려낸다.


배경은 2040년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영국이다. 통행금지 시간에 거리를 걷던 소녀 이비(나탈리 포트만)가 비밀경찰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려는 찰나,가면을 쓴 'V'가 비밀경찰들을 죽이고 그녀를 구출한다. V는 방송국에 진입해 폭압정치의 상징인 국회의사당을 파괴할 계획을 생중계하면서 독재정권 타도에 시민들이 봉기할 것을 촉구한다.


영화에는 두 개의 상반된 세계가 비교되면서 인권과 자유의 개념을 부각시킨다. 감시카메라와 여론조작으로 철저히 통제된 사회는 표면적으로는 평화롭다. 외부의 자유국가들은 테러가 난무하고 질병이 창궐하는 혼돈의 세상이다. 오랜 세월 감시체제에 길들여진 시민들은 현 체제가 최상이라고 착각한다. 마치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에 마취당한 인류와 흡사하다.


이 작품은 '매트릭스'처럼 보이지 않는 기관이 개인의 삶을 감시하고 조종하는 상황에 대한 서구인의 불안과 저항심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순응하는 지배문화의 정통성과 합법성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V는 지배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테러범이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는 영웅이다. 지배문화에서 사육된 이비의 눈에 V가 옳다는 확신이 들기까지는 숱한 회의와 시험을 거쳐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V가 '매트릭스'의 흑인 반군지도자 모피어스와 같다면 이비는 네오와 닮은 캐릭터다.


V가 쓴 가면은 통제사회에서 개성을 상실한 인간의 모습을 깨우쳐 주는 소품이다. 역설적으로 V는 획일화된 현존재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공포정치에 저항할 수 있는 영웅이 된다. 시민들이 가면을 쓰고 거리투쟁에 나선 종반부는 비로소 개개인이 자신의 참모습을 인지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주제와 캐릭터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가 담아냈던 것 같은 복합적인 사유체계와 풍부한 상상이 부족하다. 또 신선한 액션을 창조했던 '매트릭스'와 달리 이 작품의 비주얼은 전형적인 액션영화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


17일 개봉,15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