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는 서로에게 사랑의 이상을 실현해줄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일상의 굴레에서 한 쪽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다른 쪽은 그것을 수용하는 관계로 고착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 출장온 중년의 밥(빌 머레이)에게 미국에 있는 아내는 전화를 통해 남편의 기분은 아랑곳 하지 않고 살림살이에 대해서만 늘어 놓는다. 밥과 같은 호텔에 투숙한 젊은 부인 샬롯(스칼렛 요한손)도 자신의 일만 말하는 남편에게 흉금을 털어놓을 수 없다. 이국에서 만난 밥과 샬롯은 비슷한 처지임을 알고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거장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딸인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는 낯선 여행지에서의 은밀한 외도를 통해 부부간 소통부재의 현실을 선명하게 부각시킨 작품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듯한 인물들이 맛깔스러운 대사를 나누며 서로의 영혼에 파고드는 상황들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두 연인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관계를 시작하지만 점차 현실의 한계를 자각하는 멜로물의 주인공으로 바뀌어 간다. 두 사람이 일본에서 겪는 상황들은 지루한 일상에서 해방된 기분이라기 보다는 생소한 환경에서 오는 불편함에 닿아 있다. 광고 촬영차 방문한 '할리우드 배우'인 밥은 촬영현장이나 방송토크쇼에서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어 웃음거리가 된다. 욕실 샤워기의 키는 너무 작고,알람이 잘못 울리거나 느닷없이 커튼이 펼쳐져 잠을 깬다. 샬롯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불면의 밤을 보낸다. 호텔방에서 그녀가 늘 속옷을 입고 등장하는 모습은 방문객이 없는 고립의 상태를 뜻한다. 밥과 샬롯은 서로에게 불편을 덜어 줄 수 있는 소통의 대상자인 셈이다. 여기서 감독은 정신적인 교감이 육체적인 섹스보다 더 강력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밥이 겪는 살롯과의 '섹스없는 동침'과 여가수와의 '마음없는 섹스'를 대비시킴으로써 섹스가 '가장 친밀한 관계'를 담보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배우자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부부는 어린시절 자신에게 힘을 행사한 사람을 배우자에게서 떠올리기 때문에 제약이나 속박에서 해방되기 힘들고 흉금을 털어놓기도 쉽지 않다. 오히려 은밀한 외도에서 속내를 드러내기 쉽다. 두 주인공은 '은밀한 사랑'에서 배우자와의 사랑을 풍요롭게 하는 법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되는 것이다. 20일 개봉,15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