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돼 있다. 그 옆의 안성기는 깊은 슬픔에 싸인 눈으로 응시한다. 그들 뒤에 선 정재영과 허준호는 꼭 다문 입술과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다. 강우석 감독의 액션 대작 '실미도'의 포스터에 실린 얼굴들에는 비장감이 가득하다. '실미도'는 1971년 여름 서울 대방동에서 버스를 탈취해 자폭한 북파 공작원들에 관한 실화를 옮긴 영화다. 강 감독은 역사적 사실의 큰 줄거리만 남긴 채 대부분의 공간을 창작으로 채웠다. 이렇게 탄생한 '실미도'는 생동감 넘치는 인물과 속도감 있는 이야기 전개로 '쉬리' 이후 갈피를 잡지 못해온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탈출구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도입부는 1968년 남파 무장간첩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모습과 주먹패 강인찬(설경구)이 상대파 보스를 죽인 뒤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는 장면을 교차시킴으로써 실미도 부대의 창설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후 이 작품은 대원들이 '살인병기'로 만들어지는 과정 및 고무 보트와 버스를 타고 침투하는 장면 등 크게 두 가지로 구성돼 있다. 고무 보트를 타고 어둠 속에서 파도를 헤치며 침투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활기찬 대목이다. 북파 공작원으로서 그들의 존재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 정세에 해빙 무드가 조성됐을 때 그들은 사라져야만 할 운명에 처한다. 실미도 부대원들은 국가 권력의 횡포에 희생되는 개인들을 대변한다. 이들은 욕설과 폭력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강간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도덕적인 파탄자'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 어머니의 소중한 자식이자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이다. 강인찬이 끔찍이 아끼는 어머니 사진은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때문에 이 영화는 인권을 짓밟는 국가,개인을 경시하는 부권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읽혀진다. 감독은 개인의 존엄성을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잡다한 변설 대신 등장인물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었다. 설경구 안성기 허준호 정재영 등 출연배우들은 저마다 개성적인 캐릭터를 구현해 낸다. '튜브''예스터데이''내츄럴시티' 등 일련의 한국 대작들에 등장한 무국적 인물들과 달리 우리 이웃들의 얼굴이다. 잠수 유격 총검술 등 각종 훈련을 담은 액션 장면들도 힘이 넘친다. 영화적 트릭이나 특수효과에 기대지 않고 배우들이 맨몸으로 부딪치며 일군 결실이다. 다만 과도한 긴장감 탓인지 강 감독 특유의 여유가 부족하다. 모노레일 위에서 종착지를 향해 질주하는 고속열차 같은 줄거리 전개는 관객들을 중압감으로 짓누른다. 24일 개봉,15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