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임을 앞둔 대학교수. 허전함과 아쉬움이교차할 것같다. 정년퇴임은 인생에서 하나의 굵은 매듭이기 때문이다. 한국화단의 대표작가 이종상(李鍾祥.65)씨는 퇴임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그는 "신인으로 화단에 데뷔하는 느낌이다"고 소감을 밝힌다. 전업작가로 거듭태어나는 데 대한 설렘과 흥분이다. 이씨는 오는 8월 서울대 교단을 물러난다. 모교 회화과를 졸업한 지 정확히 40년만에 교문을 나서는 것. 서양화를 전공했다가 한국화로 방향을 바꿔 중진 자리에오르기까지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는 퇴임을 앞두고 21일부터 6월 17일까지 서울 인사동 선갤러리에서 개인전을연다. 출품작은 '원형상(源形象)' 시리즈 추상작품 60여점. 지난 10여년 동안 매달려온 이 연작은 종전의 '기(氣)' 시리즈와 함께 독창적 회화어법과 조형기법을 보여준다. 이씨는 전시설명회에서 이번 18번째 개인전과 선갤러리 재개관의 우연한 인연을강조한다. 그가 개인전에서 '진경(眞景)'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도입하던 1977년에선갤러리가 개관했다. 독도문화운동을 펴는 계기가 됐던 독도의 첫 방문도 이 무렵에 이뤄졌다. 그렇다고 이번 전시가 퇴임기념전 성격을 갖는 건 아니다. 오는 8월에 서울대박물관에서 회고전 형식의 전시회를 열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대박물관과 서울대현대미술관의 관장을 맡고 있는데, 임기가 둘 다 8월 31일로 정년날짜와 공교롭게겹친다. 이번 전시작은 1982년에 제작한 '기(氣)-독도'에서 올해 그린 '원형상-평화를'까지 20여년의 세월을 아우른다. 기법 역시 벽화, 장지, 닥지, 동유화로 다양해 그의 양식창조 흐름을 더듬을 수 있다. 이중 동유화(銅釉畵)는 채색의 영구성을 모색한 끝에 얻어낸 기법이다. 이씨는 1970년대를 전후해 한국미술의 새로운 정체성을 수립하고자 했다. 조선조의 전통을 고수해온 당시 화단으로서는 수상한 이단의 움직임이었던 것. 그는 틀에 박힌 서양화와 동양화의 구분법이 무의미하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한국미술의 원형이 벽화에 있다고 본 그는 특히 고구려 벽화에 주목했다. 고구려 벽화를 낳은 주인공은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작가에 그치지 않았다. 위대한 화가이자 훌륭한 건축가였고, 정밀한 연금술사이자 심오한 철학자였다. 그들의 예술영역은 그만큼 폭넓고 자유로웠다. 이씨를 안타깝게 했던 것은 한국미술이 총체성과 통시성을 상실한 채 왜소, 협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구려 벽화는 고려시대를 통과하며 사라졌고, 고려불화는 조선조 수묵화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조선의 미술은 다시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일본화의 영향을 받아 기진맥진했으며, 해방이 되자 일본화 전통은곧바로 퇴장했다. 기존의 한국화는 서양화의 위세에 눌려 여전히 기를 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지, 닥지, 동유화 등 다양한 재료실험으로 새 예술양식을 부단히 개척해낸 것은 그의 예술적 공헌이다. 고구려 벽화 연구는 특히 재료의 중요성을새삼 일깨웠다. 그에게 벽화의 생명은 접착제였다. 흔히 말하는 벽화의 변색은 채색이 시간흐름에 따라 달라져서가 아니라 접착력이 떨어지며 나타난 채색의 박락현상임을 발견했다. 동유화는 고구려 벽화의 기법을 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시도다. 재개관한 선갤러리는 종전의 2층짜리 건물을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현대적빌딩으로 탈바꿈시켰다. 모두 300여평의 전시면적을 확보, 아트숍과 아카데미 공간등을 보유해 아트상품 판매와 미술교양강좌에도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734-0458.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