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장미꽃과 같다면 질투는 가시와 같다.'(라이너 마리아 릴케) 박찬옥 감독의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청년필름 제작)은 사랑의 뒷모습인 질투의 모습을 추적한 멜로다. 질투는 연적을 향한 부러움,혹은 그것이 지나쳐 증오로 치닫는 감정이다. 한 중년남자에게 두 번이나 애인을 빼앗긴 청년의 심리가 캐릭터들간 관계를 통해 신선한 시각으로 조망된다. 이야기의 동력은 상대의 행동에 자극받은 청년의 행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플롯보다는 캐릭터에 비중을 두고 있다. 청년 이원상(박해일)은 타인을 의식하며 사는 소심한 대학원생이다. 그의 연적인 잡지사 편집장 한윤식(문성근)은 타인의 시선과 아랑곳없이 자기 감정에 충실한 인물이며,두 사람 가운데 위치한 사진기자 박성연(배종옥)은 양자의 특징을 절반씩 갖고 있다. 남의 애인을 가로챈 유부남 한윤식은 도덕적으로는 나쁘지만 지탄할 수만은 없다는 게 이 영화의 시선이다. 한윤식은 지적인 카리스마와 이성을 유혹할 수 있는 세련된 매력의 소유자다. 그에 대한 이원상의 적개심은 점차 동경심으로 바뀐다. 판에 박힌 영화라면 이원상의 반격이나 이에 대한 박성연,한윤식의 반응을 수습하는 식으로 전개됐을 터다. 이원상은 결국 자신을 짝사랑하는 제3의 여인과의 관계에서 한윤식과 비슷한 입장에 서게 된다. 사랑의 참모습에 눈을 떠가는 청년의 슬픈 초상이 '구악' 한윤식을 닮아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싫어하던 인간형으로 바뀌어 가는 우리네 얼굴이기도 하다. "누나 그 사람이랑 자지 마요.나도 잘해요."(이원상) "이제 여관가요,갑자기 누가 한 말이 생각났는데 반대로 하고 싶어요."(박성연) "아내에게도 잘하고 애인에게도 잘하는 것이 애인없이 아내에게 못하는 것보다 백번 낫다."(한윤식) 등의 대사는 각 캐릭터의 심중을 대변하고 있다. 이 작품은 '사랑에 관한 영화'라기보다 '젊음의 무기력함'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고 자기중심적인 사랑만이 떠돈다. 이원상은 애인의 마음이 떠나갈 때 어찌할 바 몰랐으며 '떠난 여자를 잊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그의 첫애인의 경우 얼굴없이 목소리와 뒷모습만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떠난 여자에게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이원상의 결심이 반영돼 있다. 이원상역의 박해일은 높은 장벽 앞에서 체념할 수밖에 없는 청년의 무기력함을 잘 연기했다. 문성근은 '경마장 가는길' '오! 수정'등에서 보여준 지식인의 이중성을 재현했고 배종옥은 눈앞의 이익만 셈하는 도시의 커리어우먼을 소화해 냈다.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과 로테르담 영화제 타이거상 등을 수상해 탄탄한 작품성을 입증받았다. 하지만 가벼운 웃음과 자극적인 볼거리들로 채워진 최근의 흥행작 주류에선 한걸음 물러서 있다. 18일 개봉,15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