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사피엔스 이후의 신인류는 호모 비르투엔스(Homo Virtuens)로 불린다. 인류역사상 전자기기와 가장 특별하고도 강력한 관계를 맺는 부류다. 이들은 불만스런 현실의 공복감을 가상세계의 이미지로 채운다. 대표적인 호모 비르투엔스는 게임매니어들이다. 게임속 가상현실에 중독된 이들에게 현실은 오히려 가상이다. 장선우 감독의 액션팬터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사랑을 얻기 위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게이머의 모험을 그렸다. 현란한 액션,이미지에 기댄 내러티브구조,단계별로 새 관문이 나타나는 게임양식 등 이 영화는 흡사 한편의 게임같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중국집 배달부이자 게임광인 주(김현성)가 동화를 차용한 게임 "성냥팔이소녀의 재림"에 접속해 벌이는 모험담이다. 주는 게임속 소녀(임은경)가 라이터를 팔지 못하고 얼어죽도록 해야 승리한다. 하지만 주는 게임의 규칙을 어기고 그녀를 살리고자 시스템과 대결한다. 성냥팔이소녀는 주가 현실에서 짝사랑하는 게임방의 소녀 "희미"와 무척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게임매니어로 대변되는 호모 비르투엔스적 인간형과 그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등장인물과 소품들의 성격은 중층적이다. 원작동화와 달리 소녀는 성냥 대신 라이터를 판다. 라이터는 소녀에게 "생명의 불"이지만 소녀가 라이터가스로 허기를 채우는 시점에선 "죽음의 불"로 변한다. 또 동화속 소녀는 자신을 억누르는 일상에 저항하지 못하지만 게임속 소녀는 어느 순간 총을 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 족속들을 향해 "무차별" 난사한다. 소녀가 일종의 "버그"로 변한 것이다. 총에 맞아 숨진 족속들은 현실의 모순을 대변한다. 불쌍한 소녀를 도와주기는 커녕 문전박대한 이들이거나,권총을 품은채 기도중인 보육원 원장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그들곁에 있다가 억울하게 총탄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이처럼 게임속 세상은 무정부상태다. 가상세계에선 현실의 도덕적,법적,종교적 금기들이 완전히 무시된다. 시민들은 오히려 소녀의 총격을 "쿨하다"고 받아들인다. 관객들도 숱한 죽음에 무덤덤하기는 마찬가지다. 살육의 장면에는 "베사메무초" 등 흥겨운 음악이 겹쳐져 관객들에게 "게임일 뿐"임을 자각시킨다. 등장인물들은 "사랑"을 위해 목숨을 미련없이 내던진다. 가준오(강타)를 사랑하는 소녀는 자신을 사랑하지만 가준오를 죽였다고 여겨지는 오비련(정두홍)을 사살한다. 또 오비련은 기꺼이 소녀에게 자기 목숨을 내준다. 호모 비르투엔스는 이처럼 타인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존재다. 이들은 언어보다 이미지에 매혹된다. 이미지는 언어보다 많은 데이터로 이뤄졌기에 매혹의 강도도 그만큼 강력하다. 그러나 주가 소녀의 사랑을 얻고 해피엔딩을 위해선 강한 집착과 매혹에서 벗어남으로써 가능하다. 금강경구절을 인용한 게임속의 한 단계인 "모든 모습이 모습아님을 본다면 본래의 모습을 보리라(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처럼 주가 집착을 버리는 순간,소녀와 사랑을 이룩하는 것이다. 또 "정신과 물질이 하나"(광선총의 레이저빔은 심력을 반영한다)임을 깨달을때 가상이 곧 현실이 된다. 결국 마음을 지배하는 자가 게임을 지배한다. 장감독은 "가상현실이 데이터라면 현실도 데이터다"며 "결국 현실과 가상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장면들간의 연결은 인과관계가 아닌 주인공들의 액션과 이미지들에 의존한다. 이 점은 스토리라인에 익숙한 영화팬들에게 생경하게 다가올 수 있다. 주가 마음을 지배하는 과정에 필요한 고뇌와 번민의 시간이 지나치게 짧게 처리된 탓도 있다. 다양한 상징과 은유를 뒷받침해주는 에피소드들도 생략돼 있다. 그러나 수준급 액션장면들이 많아 입장료 7천원이 아까울 정도는 아니다. 13일 개봉.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