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림에는 우리 분위기와 우리 공기, 우리뼛골이 배어야 한다. 내가 그린 산수나 초가는 우리 나라가 아니면 찾아볼 수 없는세계이다" 한국 근대산수화의 대가로 향토적 삶과 자연풍경을 서정적 화필로 묘사했던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ㆍ1897-1972)의 30주기를 맞아 큼직한 전시회가 마련된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는 9월 6일부터 10월 6일까지 '청전 이상범의 진경산수'전을 열어 청전이 1950-60년대에 그렸던 작품 중심으로 모두 50여점을 내놓는다. 출품작에는 1926년에 그린 '초동(初冬)'과 1940년대에 제작한 금강산 전경 12폭도 포함돼 있다. 갤러리측은 "한국 전통화단의 굵직한 맥을 형성한 청전의 예술세계를 조명함으로써 침체된 한국화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30주기전을 기획하게 됐다"면서 "일반에처음 공개되는 작품이 30여점에 이른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출품작 중 가장 주목되는 작품은 1940년대 전반에 그린 금강산 12경 연작(각 70.5×50.5cm)으로, 마라톤 선수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에 연루된 작가가 회사에서쫓겨난 뒤 금강산행길에 올라 제작했다. 동아일보사에서 소설삽화를 그렸던 청전은 베를린 올림픽(1936년)에 출전해 우승한 손 선수의 사진이 들어오자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에 흰 물감을 칠해 신문을 만들었다가 경찰에 연행돼 고문과 감옥생활을 한 뒤 언론기관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어떤 과격행동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간신히 풀려났다. 청전은 석방된 날부터 조국이 해방되던 1945년까지 15년간 거의 칩거하다시피살았는데, 금강산 12경 연작은 이 기간 겪어야 했던 회한이 서린 작품이라고 할 수있다. 막내아들 이건걸(상명대 명예교수ㆍ한국화가)씨는 "가택수색을 당하고 감옥생활을 하시면서도 일장기 말소는 혼자 했다고 끝까지 주장하셨다"면서 "석방 후에는 누구에게도 당시의 아픔을 털어놓지 않으신 채 조용히 사셨다"고 말했다. 1948년 서예가 원곡 김기승의 청을 받고 그려준 두루말이 그림 '전 적벽부'와 '후 적벽부'(각 22.5×199cm)도 타계 직후 개최된 추모전 이후 30년만에 다시 선보여눈길을 모은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청전은 한국 최초의 근대미술학교인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입학, 당대 전통화단의 양대 거목이었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과 소림(小琳)조석진(趙錫晋)에게서 정통화법을 배웠다. 당시 절친했던 지기가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으로, 스승인 심전은 아호의앞자(心)와 뒷자(田)를 한 자씩 따서 제자인 심산과 청전에게 호를 지어주었다. 서울 인왕산 밑에 청연산방(靑硯山房)이라는 화실을 지어놓고 그림에 몰두한 청전은 시골 산야와 농가풍경을 주제로 일생을 바쳤다. 그는 집안에 물웅덩이를 만들어 거북을 기르고 닭장에는 꿩을 길렀을 만큼 자연의 운치를 즐겼고 이같은 생활과예술관은 고스란히 화폭에 반영됐다. 부드럽고 생동적인 수묵필치와 짧은 점선을 경쾌하게 중복시키는 필법은 1940년대 이후 청전의 독특한 화풍으로 정형화했다고 평론가 이구열(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씨는 설명한다. 평론가 오광수(국립현대미술관 관장)씨도 "(청전이) 영원한 한국미의 전형을 수묵산수로 완성한 겸재 이후 최대의 작가임을 발견한다"면서 "그는 겸재나 단원과 같은 한국산수의 맥을 이으면서도 독특한 자기세계에서 또 하나의 한국미의 전형을 확립했다"고 평가한다. 9월 14일 오전 11시에 열리는 부대행사에는 유홍준 명지대 교수가 나와 '청전의진경산수'라는 제목으로 강연한다. 또 9월 29일 오전 11시에는 초등학생 50명(선착순ㆍ참가비 1만원)을 대상으로 '한국화가 임태규와 산수 그리기' 행사가 마련된다.관람료는 어른 3천원, 학생 2천원. ☎ 734-6111~3.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