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영화 "긴급조치19호"와 "라이터를 켜라"가 흥행 맞대결을 벌인다. 두 영화는 넉넉한 웃음으로 권력을 조롱하고 세태를 풍자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긴급조치 19호"에는 김장훈 홍경민 등 국내 유명가수들이 대거 출연했고 "라이터를 켜라"는 차승원과 김승우 등 투톱의 연기력을 내세워 관객몰이에 나선다. [ 라이터를 켜라 ] 특전사 취사병출신 "어리버리 백수" 허봉구(김승우)는 예비군 훈련날 전재산 3백원을 털어 라이터를 산다. 그러나 봉구는 라이터를 건달두목 양철곤(차승원)에게 빼앗긴 뒤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 철곤이 탑승한 부산행 야간열차에 오른다. 철곤은 기차안에서 국회의원 박용갑(박영규)에게 선거지원 대가를 받으려고 열차탈취극을 벌인다. 장항준 감독의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는 열차탈취소동에서 새 영웅탄생을 알리는 유쾌한 우화다. 그 영웅은 악당을 멋지게 물리치는 헐리우드 주류영화속의 영웅들과는 사뭇 다르다. 다른 승객들에게 떠밀려 얼떨결에 악당과 대결하다가 돌머리로 악당을 퇴치하는 것이다. 열차탈선이란 극한 상황을 타개하는 진정한 영웅은 박용갑이 대변하는 정치권력도,양철곤이 상징하는 폭력도 아니다. 박용갑의 버티기는 끝내 양철곤의 폭력앞에 꼬리를 내린다. 대다수의 승객들은 눈치만 살피거나 말만 앞세우는 기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너무 약삭빠르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을 못한다. 평소 "어리버리"로 놀림감이던 봉구같은 인간형야말로 위기상황에서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행동하는 민초"가 된다. 그 행위는 거창한 구호아래 움직여지는게 아니다. 봉구는 오로지 라이터를 되찾기 위해 뭇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버틴다. 라이터는 비록 하찮은 물건이지만 그에게는 전재산이자 희망의 상징이다. "왕따"와 "낙오"인생에게 갈채를 보내는 감독의 시선은 따스하다. 동시에 비겁한 군중,이중적 권력에 냉소를 던진다. 봉구역의 김승우는 오랜만에 적역을 만난 것 같다. 캐릭터는 서서히 그러나 끈질기게 달아오르는 무쇠솥 같은 분노와 의지를 표출한다. 정치인역의 박영규는 "주유소습격사건"의 인질에서처럼 감정을 과다하게 노출하지 않는다. 끓는 감정을 속으로 삭여내리면서 정치인의 허세를 수면위로 떠오르도록 하고 있다. 불만을 쉴새없이 떠벌리는 강성진,한박자 빠르거나 늦게 행동함으로써 실수를 연발하는 이문식,어떤 상황에서도 방관만하는 소시민 유해진 등 조역들의 감초연기도 시종 웃음을 머금게 한다. 그러나 조폭두목역의 차승원은 웃음을 유발하려는 집착이 지나쳐 보기에 부담스럽다. 조폭들이 열차를 접수한 뒤 승객들의 불안감이 너무 가볍게 묘사된 것도 흠이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