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를 채우는 최상의 요기는 수돗물 들이켜기. 피땀에 범벅된 몸을 씻기 위해 줄서서 여러 시간 기다려야 하는 체육관 샤워시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밖에 없는 가난뱅이. 현실은 절망을 말하지만 희망은 그래도 꿈틀댄다. "챔피언"이 되고픈 열망과 그곳을 향해 질주하는 집념이 있다면. "친구"로 한국영화사의 새지평을 열었던 곽경택 감독의 신작 액션드라마 "챔피언"은 바닥인생이 들려주는 희망찬가다. 주인공 김득구는 지난82년 라스베이거스에서 맨시니와 WBA 라이트급 세계챔피언타이틀 경기중 사망한 비운의 복서. 그는 비록 경기에선 졌지만 인생에선 이겼다. "진정한 챔피언은 이긴 사람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갖는 타이틀이다"(곽감독) "챔피언"은 김득구의 복싱이력과 함께 순정한 삶,사랑과 우정을 훑는다. 80년대 초반의 시대배경과 함께 당시의 순박한 정서가 깔끔하게 묻어난다. 헐리우드영화 "록키"식의 과도함에 경도되지도 않았고 "알리"식의 이념적 편향에서도 벗어났다. 외판원과 건설인부로 전전하는 김득구는 권투의 길로 접어든다. "권투만큼 정직한건 없어.남들이 열번 뻗을때 나는 열다섯 스무번 뻗으면 되는거지"란 신념에서다. 복싱선수는 미스코리아보다 거울을 많이 본다. 거울속에 서 있는 또 다른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하니까. 그는 자기이름을 새겨넣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훈련한다. 뭇사람들앞에 스스로를 노출시켜 꾀부릴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국챔피언,동양챔피언,세계챔피언 등 13번의 경기는 박진감있게 표현됐다. 특히 레이 맨시니와의 세계챔피언타이틀전은 맨처음과 후반부에서 등장해 페이소스를 짙게 드리운다. 그러나 13년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연습도장에 나타나 새 희망을 기약한다. 그 모습은 득구의 어린시절과 흡사하다. 속초바닷가에 살던 어린 득구는 복서의 꿈을 안고 무작정 버스에 올라탄다. 그는 복서생활에서 연인 경미를 운명적으로 만나 자기세계로 끌어들인다. 그 방법은 세련됨이 아니라 소박함이다. 그녀가 탄 버스를 좇아 뛰거나 교회를 찾아가며,다방에서 다짜고짜 사랑을 고백하는 식이다. 득구는 벽에 붙여뒀던 "여자는 인생의 걸림돌이다"란 문구를 "여자는 인생의 디딤돌이다"로 바꾼다. 체육관 친구들과의 우정도 곁가지로 이어진다. 괄괄한 성격의 종팔과 과묵하고 믿음직스런 상봉과의 교류,권투와 인생을 가르쳐준 스승 김현치 관장과의 관계도 뭉클하다. 80년대의 복고풍 분위기가 사실적으로 재현돼 감동의 깊이를 더한다. 포니택시,구식 간판,구세군냄비가 눈에 띄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명동거리,"오라잇"을 외치는 말죽거리행 버스,띠운세가 나오는 다방 재떨이,나이트클럽의 허슬춤,곤로에 끓여먹는 삼양라면,줄무늬 커플 티셔츠와 "라이방" 잠자리 안경 등의 소품,송재익캐스터의 권투중계 등은 정교하게 시대상을 재현했다. 김득구역의 유오성은 자신의 연기세계를 적어도 한뼘쯤 더 넓혔다. 고된 훈련으로 복서같은 몸매를 만들었다. "친구"에서 사용했던 억센 부산사투리가 여기서는 능란한 강원도사투리로 바뀌었다. 곽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김득구가 왜 (하필)나를 선택해 자기얘기를 말하도록 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28일 개봉. 12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