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닉 룸(Panic Room)'이란 서양 중세시대 성(城)의 맨 꼭대기 방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전란 때의 피신처로 바뀌었다. 9ㆍ11 테러참사를 맞아 말 그대로 정신적 '패닉(공황)' 상태에 빠진 미국인들은 앞다투어 집 안에 난공불락의 방을 설치하는 붐이 일고 있다. 9ㆍ11의 충격은 지난 3월 말 미국에서 개봉된 「패닉 룸」을 빅히트시켰고 영화「패닉 룸」은 또다시 실제의 '패닉 룸' 수요를 부채질하는 연쇄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유달리 변란이 끊이지 않아 예부터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나서고 다락방이나 움집을 은신처로 애용해왔던 우리나라의 반응은 어떻까. 오는 21일이면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다. 「패닉 룸」의 얼개는 지극히 단순하다. 무대는 19세기 고택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주요 등장인물도 대여섯 명에 지나지 않는다. 남편과 이혼한 멕(조디 포스터)과 사라 모녀는 뉴욕 맨해튼의 4층집으로 이사한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외관이지만 침실 옆에는 콘크리트와 강철로 둘러싸인 비밀의 방이 숨어 있다. 이곳에는 별도의 전화선, 집안 구석구석과 연결된 모니터, 자체 환기 시스템, 물과 비상약 등이 갖춰져 있다. 부동산 중개업자의 자랑을 불길하다는 표정으로 흘려듣던 멕과 사라는 첫날 밤부터 패닉 룸으로 피신할 상황에 맞닥뜨린다.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독차지하려는 주니어가 패닉 룸을 설계한 버냄과 정체불명의 라울을 데리고 침입한 것이다. 이때부터 멕 모녀와 세 사내의 목숨을 건 사투가 벌어진다. 집주인은 이들과 대적할 의사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필요한 것 챙겨서 어서 나가라"고 부탁하는 전형적인 상류층 여성. 침입자 역시 빈집인 줄 알고 들어왔다가 당황하는 마음 여린 인물이다. 그러나 침입자가 노리는 것이 바로 패닉 룸의 비밀금고에 있다는 상황은 침입자를 점차 흉포하게 만들고 집주인도 여전사로 변하게 한다. 도입부의 기둥줄거리만 보고도 범상치 않음을 짐작했겠지만 「패닉 룸」의 성공이 시류 덕으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세븐」의 감독 데이비드 핀처와 「미션 임파서블」의 작가 데이비드 코웹은 집주인과 침입자,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몇차례 역전시키면서 솜씨있게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어릴 적 어른의 눈을 피해 벽장이나 장롱에 숨어 있던 경험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때의 긴박감 넘치는 스릴을 잊지 못할 것이다. 패닉 룸을 만든 장본인의 공성과멕 모녀의 수성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의 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을 찾는 기척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해지듯이 모니터에서 사라졌던 침입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멕이 맞닥뜨린 가장 큰 난제는 딸의 목숨을 살릴 주사기와 약이 밖에 있다는 것.이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멕은 피신한 것이 아니라 고립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전한 공간'에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주니어 일당이 멕의 집에 들어올 때 카메라의 움직임도 눈여겨볼 만하다. 2층침실에서 시작돼 현관 열쇠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갔다가 나온 뒤 집 구석구석과 범인의 움직임을 비추고 다시 침실로 돌아가는 5분간의 롱 쇼트는 이 영화에서 공간이갖는 의미를 극단적으로 부각시킨다. 조디 포스터를 비롯해 몇명 되지 않는 배우들의 호연이 도드라지게 보이지 않는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기자 hee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