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천동. 고기잡이배 몇척이 서로 어깨를 비비며 매여 있는 20여호의 이 조그만 어촌은 경주 김씨가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솔밭에 둘러싸여 있어 솔밭골이라고도 부른다. 솔밭 고갯마루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푸르디푸르러 눈이 시린 저 바다 건너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파도가 찰랑거리며 부서지는 뱃전의 아득한 자장가는 꿈일까, 생시일까. 김한(71) 화백. 그는 유년의 기억이 묻혀 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일관되게화폭에 조형화해왔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입선한 지 올해로 45년째이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그림에 파묻혀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김씨가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작업해온 그림들을 모아 큼직한 화집으로묶어냈다. 여기에는 유화 178점과 수채화 및 소묘 30점이 수록돼 그의 예술적 발자취를 어림잡게 한다. 때맞춰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와 명동화랑에서는 화집발간을 기념하는 초대전(17-30일)이 분산 개최된다. 평론가 신항섭씨는 200자 원고지 208장에 이르는 작품론을 화집에 실어 김씨의 삶과 예술을 총체적으로 정리했다. 김씨는 비구상과 순수추상으로 예술계에 본격 입문한 뒤 1970년대부터 고향의정경을 모티브로 한 구상세계에 몰입했다. 화집의 작품에서는 아기를 등에 업은 여인들이 천상의 선녀처럼 삶의 자유를 만끽하기 일쑤다. 여기에 닭, 물고기, 나비,소나무, 소, 닭, 파도, 구름 등이 소품처럼 끼어 있다. 대부분 푸른 색조의 이 작품들은 세련된 조형미가 유려하게 구현돼 있으나 다른한편으로는 짙은 애조가 깃들어 있다. 뭔가 강렬하게 희구하는 작가의 소망이 절절히 배어 있는 것이다. 작품제목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수십년간 묵혀온 향수를 회한의 실타래처럼 하나하나 풀어낸다. 김씨는 '환쟁이'는 안된다는 부친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의대에 진학했으나 문학서적을 탐독하면서 화가의 꿈을 몰래 키웠다. 바다를 소재 삼아 홀로 조형의 세계에 관심 가지며 상상의 날개를 폈던 그는 중학교 졸업식 때 미술특기상을 받을 정도로 이미 화가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은 부친의 강압에서 벗어나는 빌미가 됐다. 그러나 단신월남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독한 생활고. 의지할 데라곤 손재주밖에 없던 그는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으로 연명했는데, 이런 방황의 세월은 나이 쉰까지 계속됐다. 1957년 제6회 국전에서 입선하고 1979년 이후 아홉 차례 개인전을 열었지만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 못한 것. 이는 화단활동에 적극적이지 못한 성격 탓이기도 했다.그러나 반짝이는 보석은 결국 눈에 띄기 마련. 1991년 상업화랑의 초대를 받은 김씨는 1995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함으로써 미술계에 아주 뒤늦게 명함을 내밀었다. 따라서 이번 화집 발간과 전시회는 김씨가 작품성을 폭넓게 평가받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신항섭씨는 "작가는 비현실적 세계가 돼버린 고향의 삶과 애환을 짤막한 이야기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면서 "바다, 하늘, 해, 달, 집, 교회 등의 소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조합되는 그의 그림은 하나하나가 시이자 수필이고 엽편소설이다"라고말한다. ☎ 736-1020(가나인사아트센터), 771-0034(명동화랑).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