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자기 안에서 소년 하나가 고개를 떨어뜨린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말할 수 없이 고독한 모습이다. 또다른 자기에서는 야윈 개 하나가 밤하늘을 울려다 보며 컹컹 늑대울음을 운다.무엇을 향한 그리움의 몸부림일까. 달도 없는 풍경엔 이내 고즈넉함이 밀려든다. 늘그막에 `바보화가' 별명을 얻은 한인현(韓仁炫ㆍ71) 화백. 그는 개인전을 통해 그리움과 고단함의 읊조림을 넋두리처럼 들려준다. 10일부터 23일까지 서울 팔판동 갤러리 도올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분청도자 작품 30여점을 내놓는다. 한씨는 도예가 우승보씨가 성형한 초벌 도자기에 철사(鐵砂)를 재료로 드로잉하는 역할을 맡았다. 작품에는 그가 평생 동안 추구해온 고독과 사랑의 주제가 특유의화필로 구현돼 있다. 한씨의 고향은 함남 함흥. 한국전쟁 때 단신월남한 그는 남에서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지만 기다림과 그리움의 실타래를 여전히 끊지 못한다. 이번 전시작을 포함해 그의 작품에는 이같은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는 데생에 관한 한 국내 으뜸 작가군에 든다. 어떤 장면이든지 1-2분 안에 벼락같이 옮겨낼 만큼 탁월하다. 잡지와 단행본의 삽화를 가장 많이 그린 사람이 아마자신일 것이라고 한씨는 말한다.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데생은 그가 해주미술학교 시절부터 익혔다. 쌀을 팔아고입한 고흐 작품집을 펴놓고 밤새도록 수없이 그렸던 한씨는 고흐를 평생의 귀감을삼아 작업했다. 작품의 첫 고객은 김일성 주석. 해방 직후 흥남고급중학 재학 때 전람회에 낸 그림이 김 주석의 거처의 장식용으로 뽑히는 묘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한씨의 작업량은 엄청나다. 그동안 그림 작품수는 자신도 헤아리지 못할 정도.한국전쟁 종군 시절에 제작한 것만도 980여점에 이르렀는데, 4.19혁명 와중에 모두불타는 아픔을 겪었다. 그의 데생 애착 역시 무척 강하다. 그림의 시작이자 마지막이 데생이라는 게 그의 예술관. 한씨는 하루 두어 시간의 수면시간을 빼고는 대부분 작품제작에 매달린다. 화구 역시 소박하기 이를 데 없어 몽당연필이 주요 자산이며 붓도 40년 동안 쓰기도 해 차라리 작대기에 가깝다. 한씨는 자식과도 같은 작품을 마음에 내켜 팔아본 적이 없다. 타의로 마지못해몇 차례 내주었을 뿐. 그래서 생활은 늘 곤궁했다. 비록 살기 어렵고 근래들어 다시화재를 당해 4천여점이 연기 속에 사라진 아픔이 있었지만 차마 팔지 못하는 것은어쩔 수 없는 그의 천성이다. 그는 "언제가 될지 모르나 내 미술관이 생겨 남은 작품이라도 한 자리에 전시되는 날을 그려본다"고 말한다. 그는 전시회 도록의 이력에 `비미술협회원'이라는 문구를 달아놨다. 제도권의주변부에서 활동하는 작가로서 갖는 자부심과 오기가 실려 있는 셈. 어엿한 원로명단에 끼지 못한 그이지만 방송인 이계진씨를 만나면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씨는아름답고 치열한 예술혼을 가진 이 `숨은 화가'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이씨는 저서 「바보화가 한인현 이야기」(디자인하우스)에서 "간혹 그러하듯이`그'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그'가 천재화가였음을 안타까워 한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가 우리와 함께 살며 행복한 모습으로 화폭 앞에 붓을 잡고 잇을 때 그에 대하여 충분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썼다. ☎(02)739-1405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