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가 봄 프로그램 개편과 함께 선보인 '역사탐구-과거와의 대화'(목 오후 8시30분)는 7일 '조선시대의 특별검사,암행어사'편을 내보낸다. 암행어사에 얽힌 일화들을 통해 현대의 부패감시 기구들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 살펴볼 예정이다. 사회는 소설가 고원정씨(사진)가 맡는다. 담당 김유열 PD는 "조선시대 부정부패에 맞서 싸웠던 '암행어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다"며 "검찰 감사원 금융감독원 부정부패방지위원회 등 비리와 싸우는 기구들의 기능을 점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암행어사는 청렴과 능력을 인정받아야만 임명될 수 있었던 자리다. 왕의 권위를 대신하는 직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암행어사로 꼽히는 박문수는 어사가 될 당시 나이가 37세였으나 영조로부터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느냐는 지적을 받았을 정도.이런 엄격한 과정을 거쳐 선발되면 왕이 직접 제비를 뽑는 '추생'을 통해 임지를 부여받고 현지에 나가서 해야 할 임무가 적힌 '봉서'와 마패를 받아 암행어사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 활동은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 적발 뿐만 아니라 세금부과 문제,벌목 등 민생문제,각종 경제문제 등을 다루는 일종의 종합 민원해결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암행어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암행어사 출두'라는 말이다. 기록으로 보면 순조 때 암행어사 이시원은 37개 읍을 돌며 20군데에서 출두했다. 반면 정조 때 암행어사 이희갑은 한번도 출두하지 않아 정조가 화를 냈다고 한다. 이렇게 여러 곳을 돌면서 활동을 하는 암행어사의 출장비는 얼마였을까. 순전히 명예직으로 자비부담이 원칙이었다. 또 진짜 암행어사가 가짜 암행어사로 오인받는 일도 있었다. 부패한 관리들은 암행어사를 뇌물로 매수하기도 했다. 가끔 뇌물을 받는 암행어사도 있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김 PD는 "공직기강을 바로잡고 민심을 수습했던 암행어사는 부정부패를 용납하지 않고 그것에 맞서려는 조선왕조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말했다. 길 덕 기자 duk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