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가 구자현(47)씨. 그는 판화를 고집하는 몇안 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76년부터 13회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2년 전의샘터화랑전을 빼고는 판화전 일색이었다. 한눈 팔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온 셈이다. 이런 그가 근래 들어 작업에 변화를 꾀했다. 오는 7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청담동 카이스갤러리에서 열리는 14회 개인전도 그중 하나다. 출품작은 생석회 바탕에 금종이(金紙)를 붙여나간 금지화(金地畵) 30여점이다. 이번 전시작은 순수회화라고 할 수 있다. 구사된 템페라 기법은 일반에 생소한편. 그러나 템페라는 600년 역사의 서양화 기법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도 이 기법으로 그려졌다. 그의 작업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그러나 과정이 무척 힘들다. 깨끗이 빤 삼베에 생석회를 개어 칠한다. 마르면 칠하고 다시 마르면 또 칠하기를 무려 열두 번. 켜가 앉고 두께가 쌓이면 표면을 칼로 깎고 그라인더로 갈아낸다. 그래서 얻어지는 것은 순백색의 평면이다. 논어에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구절이 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연후'라는 뜻이다. 순백은 가장 순수한 상태. 모든 색을 받아들이는 처녀성 그 자체라고 할까. 검정색이 비타협이라면 순백색은 수용과 순종을 의미한다. 구씨는 이 순수의 세계에 금종이를 붙여나간다. 모두 채우고 나면 화면은 어느새 황금(金)의 땅(地). 금지화로 이름붙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 불변과 지고(至高)의 벌판은 빛의 방향에 따라 요동친다. 이 환상의 변주는 주변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해 변덕 심한 아가씨에 비유될 정도다. 전시장은 황금의 땅인 엘도라도를 연출한다. 황금색은 종교적 경건성의 상징으로 이해돼왔다. 전통 불상과 벽화에 금박을 입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작가는 이같은 종교적 암시를 넘어 현대성으로 승화시켜 나간다. 황금색을 생명의 상징인 땅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채롭다. 홍익대 미대를 나온 구씨는 일본 오사카 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금지화를 처음 선보인 것은 지난번 샘터화랑 전시로, 이번 카이스 갤러리전은 그간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리다. ☎ 511-0668.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