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38) 감독의 두번째 영화 "봄날은 간다"가 28일 개봉된다. 일상에서 겪는 "사랑의 상처"들을 수습하는 과정이 깔끔한 영상위에 세련된 영화언어로 그려지는 작품이다. 허감독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98년)에서 남녀의 거리가 "사진"을 통해 서서히 좁혀졌던데 비해 이 작품은 "소리"를 매개로 만남과 이별의 여정들을 포착해 낸다. 지방라디오방송국 PD 은수(이영애)와 녹음기사 상우(유지태)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들려주는 프로그램을 함께 제작하면서 급속히 가까워진다. 그러나 첫 만남엔 곧 균열이 생긴다. 사랑을 보는 눈높이가 달라서다. 상우는 사랑을 소리처럼 테이프에 채록해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는 것으로 믿는다. 반면 "이혼녀" 은수는 "애정의 휘발성"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이혼의 상처는 이별에 대한 내성마저 길러줬다. 상우가 은수에게 던진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란 말은 주제를 함축한다. 상우는 번민끝에 "사랑의 생채기"를 추억으로 승화시키는 법을 터득한다. 벚꽃이 만발한 노변에서 두 연인의 재회와 작별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서서히 포커스가 흐려지는 은수의 모습은 그녀가 상우의 기억속에서 조금씩 잊혀질 것임을 상징한다. 그러나 멈칫멈칫 돌아보는 행동들에서 이들은 훗날 서로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될 것임을 예고한다. 다른 한 축으로 전개되는 상우 할머니의 연애담도 "사랑=추억"이란 등식을 제시한다. 치매걸린 할머니는 늘 기차역에 나가 "숨진" 할아버지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자신을 아껴주던 젊은 시절의 남편을 향한 것이지 바람을 피웠던 중년의 남편에 대한 것이 아니다. 중년 이후 남편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의 기억에서 이미 소멸됐다. 할머니는 "버스와 여자는 떠난 다음 잡지 않는 거란다"는 말로 상우가 아픔을 스스로 이겨내는 길잡이 노릇을 한다. 제목속의 "봄날"은 사랑의 순간을 뜻한다. 이영애와 유지태는 섬세한 감정의 결을 과장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사랑했지만 이혼할 수도 있는" 은수의 캐릭터는 변화무쌍한 여심을 대변한다. 두 사람이 눈부신 산하를 배경으로 사운드를 채록하는 장면들도 긴 여운을 남긴다. 삼척 대숲을 흔드는 바람소리,정선 아우라지의 물소리,맹방해수욕장의 파도소리,노부부의 정선 아라리 이중창,강진 보리밭이 일렁이는 소리들은 순수한 사랑처럼 언어세계 너머에 존재한다. 보리밭에서 은수의 허밍 녹음소리를 들으며 상우는 추억을 되새긴다. 봄날은 그렇게 지나간다. 그러나 "속도의 시대"에 펼쳐지는 "느림의 미학"은 할리우드영화에 길들여진 영화팬들에게 다소 따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느린 장면전환,삶의 미묘한 행간을 포착한 에피소드들은 관객의 능동적 참여를 요구한다. 이영애는 "사랑의 감정을 아는 사람들이 이 영화의 관객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