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찍고 나서 한층 더 성숙해진 것 같아요."


허진호 감독의 신작「봄날은 간다」에서 커플로 나오는 유지태(26)와 이영애(31)는 유난히 포옹을 많이 한다.


그런데 이영애(키 165㎝)가 까치발을 하고도 고개를 한참 뒤로 젖혀 유지태(키187㎝)를 바라볼 정도로 둘은 키 차이가 나 슬며시 미소를 자아냈다.


물론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애틋하게 느껴지는데서 오는 반부러움이 섞인 미소다.


`꺽다리 배우' 유지태가「봄날…」에서 연상의 방송국 아나운서(이영애)와 불같은 사랑을 나누는 녹음 기사 `상우'역을 맡아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갑자기 찾아온 사랑에 마냥 행복에 겨워하지만 뜨겁게 달구어진 쇳덩이가 찬물에 식어버리듯 태도가 돌변해버린 여자 앞에서 그는 허망해하며 괴로워한다.


"한 장면을 찍는데 평균 5시간씩 걸렸을 거에요. 매번 서너 가지 다른 모습으로 찍었고요. 다른 장면들로 편집하면 아마 전혀 새로운 영화가 나올 겁니다."


자신을 버린 여자가 다시 찾아와 그에게 손을 내밀 때, 돌아서지도 붙잡지도 못한 채 오랫동안 망설이는 모습의 엔딩 장면도 여러 가지로 찍은 버전 중에 하나.


유지태는 시사회에 와서야 그 장면이 최종 선택된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평범한 남녀의 연애 감정을 평범한 일상에 담아 가감없이 그렸던 허감독은 유지태에게 자연스러운 실제 모습을 투영해주길 주문했다.


"리얼리티를 가장한 리얼리티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말하는 유지태는 감독의 기대 이상을 해냈다.


잔뜩 술에 취해 `은수'에게 찾아가는 장면에서는 실제 사랑의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스물 여섯살의 남자라면 한번 쯤 사랑의 고역을 치루지 않았겠습니까?"


시사회가 끝난 뒤 한 관객은 그에게 달려와 "유지태씨, 아까 그 장면 정말 술먹고 찍은 것 아니에요?"라며 수줍게 물었다.


그러나 경험을 되살리는 것 만으로는 완전한 상우가 될 수 없었다.


"극 중 상우가 두 손으로 아버지의 술잔을 받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순전히 상우의 입장이 돼 상상으로 표현한 연기에요."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읜 유지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씁쓸해했다.


지난 98년 김하늘과 호흡을 맞춘「바이준」으로 데뷔한 유지태는「주유소 습격사건」(99년)의 `빼인트'역을 맡으면서부터 연기파 배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어 지난 해에만 멜로물「동감」, 공포물「가위」, 액션물「리베라메」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 세 편에 잇달아 출연하는 진가를 발휘했고, 네티즌이 선정한 `2000년 최고의 배우'로 뽑히는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특유의 해맑은 미소가 여성팬들을 설레게하는 멜로 영화에서 유지태는 더욱 돋보이는 듯 했다.


"제 외모가 여린 느낌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이젠 몸으로 움직이는 연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현재 중앙대학교 대학원(영화연출)에 재학 중인 그는 차기작을 개그맨 서세원(SW엔터테인먼트)이 준비 중인 민병천 감독의 SF영화「내추럴시티」로 결정했다.


(서울=연합뉴스) 조재영기자 fusionj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