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의 아줌마.아이들 넷이 주렁주렁 달렸다. 다음달이면 남편의 죽은 형이 남긴 빚갚기에서 손을 턴다는 기쁨에 들떠있다. 그런데 남편이 다니던 증권회사에서 잘리고 말았다. "작전"에 동참하지 않은 "시대착오적 정직성"이 죄목이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보증섰던 친구가 부도후 잠적했다. 한달내로 1억원을 마련하지 못하면 어렵사리 장만한 18평 아파트마저 날리고 일가족이 거리로 나앉을 처지다. 백방으로 뛰어보지만 1억원을 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길이 생겼다. 대학때 자신을 쫓아다니던 선배가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하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애를 넷이나 두고,가슴은 처지고,슬며시 배도 나온(적어도 영화속 설정이 그렇다)아줌마에게 말이다. 그렇다면 질문해보자.여기서 선배와 한번 동침하는 것이 문제인가? 영화 "베사메무초"(감독 전윤수.제작 강제규 필름)가 주인공 영희(이미숙)에게 부여한 딜레마다. 제작진이 개봉에 앞서 같은 내용을 두고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여성 80%는 "기꺼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영화는 "대단한 문제"라는 단단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어른영화"인 "베사메무초"엔 미덕이 많다. 감독은 데뷔작답지 않게 안정감있는 연출력을 과시한다. 단란한 가정에서 소박한 행복을 누리던 주인공들은 차근차근 놓아지는 치명적 덫을 밟으며 궁지에 몰린다. 그들에게 닥친 난관은 자칫 구질구질해지거나 눈물바람조로 치우치기 쉬울 함정을 과장없는 묘사로 피해나간다. 전광렬.이미숙 커플은 중견배우다운 진지한 연기로 공감을 끌어낸다. 아이들을 위해 교육보험만은 깨지 않으려 몸부림치거나 가족을 위해 수치감을 무릅쓰는 "모성"은 눈시울을 적신다. 부부에게 내려진 구원의 동앗줄은 가혹하긴 하다. 부유층 여인으로부터 잠자리와 1억원을 제안받기도 했던 남편은 그러나 선배와 자고난 아내가 괴로움을 털어놓자 "왜 말을 하느냐"며 다그친다. 자신이 초래한 그 무거운 짐을 혼자 지지 않았음을 탓하는 이기심의 극치다. 하지만 무엇이 그리도 문제란 말인가. 첫아이를 천식으로 잃고,둘째 아이마저 천식에 시달리는 그들이 지하방으로 쫓겨나게 생긴 마당에 여인의 "선택"이 정녕 돌을 던질 일이던가. 극한 상황에서의 선택,부부간의 신뢰의 문제,자본주의앞에서 흔들리는 도덕,인간의 이기심 같은 여러가지 흥미로운 질문거리들 앞에서 "베사메무초"는 그저 정조에 집착하는 전통정서만에 집중한다. 숱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그저 "갈등에서 건진 우리 가족"쯤의 평범한 가족드라마에 머무는 이유다.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말야,남편이랑 사이좋게 1억씩 벌어오겠어.빚도 갚고 그 김에 집도 넓히고 그럼 남는 장사아냐"라는 한 영화인의 말은 "베사메무초"가 간과한 달라진 가치관이나 정서의 핵심일 수 있다. 31일 개봉. 김혜수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