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부산."국민학교"에 다니는 동갑내기 사내아이 넷이 있었다.

폭력조직 두목 아들로 주먹깨나 쓰는 준석,장의사집 아들 동수,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범생이"상택,촐싹대지만 착하고 명랑한 중호.네 아이들은 노상 패지어 뒹굴고 뛰놀며 둘도 없는 친구사이로 자라난다.

하지만 고교시절 벌어진 패싸움은 네명의 인생 행로를 바꾼다.

중호와 퇴학당한 준석은 아버지 뒤를 이어 조직으로 나서고 동수 또한 다른 조직에 들어간다.

"억수탕""닥터K"를 만든 곽경택 감독의 자전적 영화 "친구"(제작 시네라인II)는 70년대말부터 20여년을 함께 부대끼며 살아간 사내들의 선굵은 이야기다.

감독은 극중 화자로 등장해 어릴 적 친구들이 서로의 목숨을 노려야 하는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을 옛날 이야기처럼 들려준다.

거대한 비극을 줄기로 하지만 영화에는 살벌함이나 처절함 대신 과거에 대한 애틋한 향수가 흐른다.

애교있게 되살아난 80년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을만큼 재미나다.

수업을 빼먹은채 롤러스케이트장을 누비고,성문종합영어를 달달 외우던,10장짜리 종이회수권을 칼로 잘라 11장으로 만들어내던,그때 그시절. 진지하고 탄탄한 시나리오에 배우들의 호연은 광채를 더한다.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야 하는 의리의 사나이 유오성은 "쪽팔리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건달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미남배우 장동건도 악역 어깨에 힘을 완전히 뺀채 성실하고 진지한 연기를 펼친다.

부드럽고 깊이있는 화면은 황기석 촬영감독의 공이다.

미국 인디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또래 촬영감독중 가장 몸값이 높다는 그는 빛과 그림자를 절묘하게 조율하며 풍부한 사실감을 입혀냈다.

슬프면서도 아름답고,비장하면서도 즐거운 "친구"는 관객들에게 "오래두고 가깝게 사귄 벗"들을 머릿속에서 뒤적이게 하며 뭉클한 감동을 준다.

아쉬움도 남는다.

감독은 자신이 얽힌 사적인 이야기를 멋지게 보여주는데 분명 성공했지만 "친구"가 시대를 끌어안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남기엔 그 반경이 좀 좁아 보인다.

김혜수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