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시베리아를 무대로 한 사랑의 대서사시"

"러브 오브 시베리아"(원제 The Barber of Siberia.감독 미하일 니할코프)는 그 제목이나 수식문구로 짐작되는 분위기와 다소 거리가 있는 영화다.

"닥터 지바고"를 필두로 일련의 "러시아 영화"에 흘렀던 특유의 유장함이나 짙은 우울은 찾기 어렵다.

엇갈린 사랑과 비극적 운명을 축으로 하지만 셰익스피어 소극같은 경쾌함이 주조다.

애절한 순애보는 비장하게 늘어지거나 가라앉는 대신 부드럽게 녹아든다.

배경은 1885년 러시아.

스무살의 사관생도 안드레이 톨스토이(올렉 멘시코프)는 모스크바행 열차안에서 아름다운 미국 여인 제인 칼라한(줄리아 오몬드)을 만나게 된다.

안드레이는 첫눈에 제인에게 반하고 제인도 그의 순수한 열정에 끌린다.

로비스트인 제인은 미국인 발명가가 개발한 벌목기 "시베리아의 이발사"의 납품권을 따내기 위해 황제의 측근인 사관학교 교장에게 접근한다.

질투에 불탄 안드레이는 오페라 공연장에서 "사건"을 저지르고 시베리아 감옥에 보내진다.

그로부터 10년후.

제인은 꿈에도 잊지 않던 안드레이를 찾아가지만 그의 집에는 아이와 아내의 사진이 걸려있다.

돌아서는 여인을 먼발치서 바라보는 안드레이.

혹자는 한숨을 감추기 위해 담배를 피운다고 했던가.

그순간 안드레이가 토해내는 담배연기는 수백마디 대사보다도 깊은 울림을 지닌다.

못다한 사랑,원망,아쉬움,슬픔...

허공에 내뿜어진 연기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감정을 싣고 관객의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감정선을 다양하게 자극하는 드라마외에도 작품은 여러가지 즐거움을 선사한다.

무도회장 소동이나 보드카에 취한 장군의 좌충우돌처럼 반짝이는 에피소드가 웃음을 자아낸다.

화려한 귀족들의 무도회,흐트러짐없는 황제의 군인들.

눈밭에서 벌어지는 전통 패싸움,시끌벅적한 민속축제같은 볼거리도 풍성하다.

시네마스코프(광폭)로 담아낸 러시아의 자연경관은 또다른 즐거움이다.

순백의 시베리아 설원,황금빛으로 물든 거대 침엽수림,금빛 찬란한 돔지붕들을 감싼 노을너머 지평선은 모차르트와 쇼팽의 클래식 선율에 실려 눈부시게 빛난다.

사실 통속적인 이야기에 활기를 부여한 미할코프 감독은 러시아가 배출한 세계적 감독.

94년 발표한 "위선의 태양"(Burnt by the Sun)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고 러시아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러브..."에서는 알렉산더 3세로 출연하기도 했다.

5년만의 신작인 "러브 오브..."는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와 합작한 대작답게 제작비만도 5백80억원,엑스트라 5천여명이 투입됐다.

99년 칸 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상영돼 많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위대한 러시아"에 대한 향수나 감독의 정치적 야심이 투영돼 있다는 "혐의"때문인지 서구 평단은 평가에 인색했다.

"명징한 사회의식을 토대로 했던 "위선의 태양"에 비교할 수 없는 "러시아판 타이타닉"같다"는 비꼼도 있었다.

14일 개봉.

김혜수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