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아버지들의 즐거운 착각은
끝이 없었다.
객관적으론 아무리 뜯어봐야
그저 밉상을 면한 얼굴에
고만고만한 머리였건만
당신들의 눈에 비친 아들 딸들은
또래가운데 단연 출중한,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장래 반드시 뭐가 되어도 될 녀석들이었다.
저마다 세상에서 최고였던
그 아이들은 이제 어른으로 자라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나간다.
때로 아버지의 주관적인 눈을
그리워하는 평범한 생활인으로.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공연중인 "세일즈맨의 죽음"(아서 밀러 원작.김도훈 연출)을 찾은 관객들은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기에 바빴다.

35년간 몸바쳤던 직장에서 해고당한 한물간 샐러리맨.

두 아들에 대한 헛된 꿈을 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아버지.

막다른 골목에서 가족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겨주고자 자살을 택하는 고독한 가장 윌리 로먼에게 바로 우리 아버지들의 얼굴이 포개졌다.

연기같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진한 감동을 더한 윌리역의 이순재(65)씨.

23년 전인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으로 같은 자리에서 같은 역을 연기했던 그가 이제 주인공(63)과 비슷한 나이가 되어 다시 무대에 섰다.

"그때 입으로만 윌리를 연기했다면 지금은 가슴으로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작품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으니까요.
우선 자식농사만큼은 뜻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극중에 집 주변에 들어선 아파트 때문에 볕이 들지 않고 공해가 심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만 해도 아파트나 고층건물이 없었으니 와닿질 않았지요. IMF를 겪은 후라 생산성이 떨어지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자본주의의 비정함이나 가장의 퇴출문제에도 훨씬 공감이 갑니다"

총 23회.

원작 그대로 매회 2시간30분씩 풀로 뛴다.

아서 밀러는 더스틴 호프먼이 40대 중반일 때 윌리역을 맡겼고 호프먼은 더 나이가 들어야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사양했다.

하지만 밀러는 나중에 나이가 들면 힘이 달려 못한다며 호프먼에게 윌리역을 강권했다.

그만큼 집중력과 체력이 필요한 역할이다.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근 3년 만에 여유가 생겼어요. 오래간만에 연극을 하고 싶었던 터에 세일즈맨이 떠오릅디다. 기력이 남아 있을 때 꼭 한번 더 해보고 싶었거든요. 때마침 서울시극단으로부터 세일즈맨을 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고 두말 않고 응하게 됐습니다"

서울대 철학과 56학번.

학창시절 지금 서울시극단 단장으로 있는 1년 후배 김의경씨와 함께 연극부를 만들었고 졸업 후 곧장 연기의 길로 들어섰다.

연극무대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종횡무진 누비며 줄곧 배우로 한길을 걸었다.

한때 국회의원으로의 외도를 빼곤.

"취미를 직업으로 갖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런 점에서 전 행복한 사람축에 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는 문화예술계를 대변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뛰어들었지요. 여러 가지로 맞지 않아 그만뒀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했으니까 만족합니다"

연극 영화 드라마를 통틀어 수백편의 작품에 출연했지만 시청자들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박혀있는 이미지는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일 것이다.

대한민국 남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근엄하고 목소리 큰 가부장.

"실제로요? 아이고,어떻게 그렇게 해요. 큰소리칠 입장이 못되는 걸.그저 눈밖에나 안나면 고맙지"

허허 웃는 웃음이 따뜻한 여운을 남긴다.

30일까지.

(02)399-1647~8

글=김혜수 기자 dearsoo@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