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그에게 영화속에 온전히 스며들라고 주문했다.

"절대 눈에 띄면 안돼,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자애가 유부남인 사장을 좋아하는 거야.발길에 치일 정도로 흔한 얼굴,평범한 복장이어야 돼"

한밤에 동대문패션타운을 찾아갔다.

몸매를 완전히 가리는 펑퍼짐한 옷을 골라입고 화장도 지웠다.

영화가 극장에 걸리고 관객들의 입에 오랫동안 오르내렸다.

하지만 그의 연기를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동료 연기자들로부터 "영화에서 안보이데요"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속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가구점 미스 리.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 가운데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화 내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냈다.

김기덕 감독의 신작(22일 개봉) "섬( The Isle )"의 여주인공 희진역의 서정(28).

육지속의 외딴 섬 저수지에서 세상을 향한 마음과 입을 걸어 잠근 채 혼자 살아가는 낚시터의 젊은 여주인 역이다.

낮에는 낚시꾼들에게 음식을 팔고 밤에는 몸을 판다.

그에게 섹스는 억눌린 욕망과 야성의 분출구이자 병든이의 상처를 치유하는 마약이다.

그의 낚시터에 애인을 살해하고 도망쳐온 전직 경찰 현식이 찾아들면서 저수지에 파문이 인다.

서정은 희진이 되기 위해 끝없이 몰입했다.

스크린에 비친 그의 눈물과 광기어린 시선은 상처받은 영혼을 지닌 여인이 내뿜는 슬픔이자 서정 자신의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에 담긴 초점없는 시선에 오한을 느낀다.

그는 촬영기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고 토로한다.

"뿌리깊은 고통을 간직한 여자예요. 말문을 열지 않기 때문에 눈으로만 연기를 해야 했죠.그래서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고 섬에 녹아버리자고 작심했습니다"

촬영을 앞두고 벌레천지인 세트장에 들어가 밤새 혼자서 지내고 저수지에 떠있는 좌대에 처박혀 기억들을 하나씩 곱씹었다.

"희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의 아픈 과거를 끄집어냈습니다. 잊고싶은 과거를 하나하나 더듬어가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어요"

그의 연기력의 뿌리는 독립영화다.

지난 95년 "탈순정시대"로 늦깎이 데뷔 이후 "눈물""아쿠아레퀴엠"등에 출연했다.

"감독 배우 스태프 구분없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가 독립영화의 장점"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최고조일때 화제작 "둘 하나 섹스"를 찍었다.

이 작품은 그녀가 주인공을 맡은 최초의 상업영화가 될 뻔 했지만 외설시비로 심의에서 상영불가처분을 받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봤는데 시나리오의 느낌과 전혀 다른 영화가 돼 있는 걸 보고 저도 놀랐어요. 롱테이크로 찍은 초반부의 섹스신이 남용돼 죽음을 상징하는 섹스의 의미가 변질돼 있었어요"

"박하사탕"이후 영화를 향한 갈증은 더욱 깊어졌다.

이때 김기덕 감독을 만났다.

"섬"에 대해 듣고서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쏟아놓았다.

자신이 그리고 있는 작품을 이해하는 그에게 감독은 가방에서 구깃구깃해진 작업용 시나리오를 건네줬다.

"집에 돌아가 시나리오를 읽는데 바로 내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 미치겠는거예요. 하지만 그때는 주인공 캐스팅이 이미 끝난 상태였어요"

다음날 시나리오를 돌려주러 찾아간 사무실에는 오디션이 준비돼 있었다.

감독은 "바로 저 눈에 내가 원하는 눈빛이 들어있다"며 제작진을 설득,그를 주인공으로 낙점했다.

서정은 솔직한 연기자가 되기를 원한다.

"섬"에서도 수없이 울었지만 한번도 거짓 눈물은 없었다.

희진이 입고 있는 옷 상처 집을 떠올려도 눈물이 쏟아졌다.

영화를 찍고 섬에서 빠져나온 이후에도 예민해진 성격때문에 적응하는 데 적지 않는 고생을 했다.

이런 그에게 감독은 "자네를 존경합니다"라는 편지를 남겼다.

배우가 들을 수 있는 최대의 찬사였다.

김형호 기자 chsan@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