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가 지난 29일 연구실에서 기술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가 지난 29일 연구실에서 기술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미·중 패권 분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숨 가쁘게 전개되는 가운데 미국 백악관이 지난 4일 전략기술에 관한 국가표준전략을 발표했다. 작년 2월에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유럽판 기술 표준전략을 내놨다. 전통적으로 기술 표준은 기업과 기술 전문가들의 합의, 즉 시장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하지만 이제는 국가가 전면에 나선다.

국가 주도의 기술 표준 전쟁에 불을 댕긴 것은 2018년 발표된 ‘중국표준 2035’다. 중국은 인공지능(AI), 양자 정보과학, 신재생에너지 기술 등 미래 첨단 분야를 콕 찍어 중국발 기술을 국제표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유럽과 미국의 국가표준전략은 이에 대한 대응인 셈이다.

시장 논리를 따르던 기술 표준이 국가전략의 대상이 됐다는 것은 최근 글로벌 기술 경쟁의 게임 규칙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기술과 경제 문제는 시장이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국가는 보조적인 역할만 맡아왔다.

기술 경쟁의 시대, 국가가 귀환했다. 시장과 국가가 함께 벌이는 2인 1조 경기다. 과학기술자와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국가전략 기술을 논의하고 실리콘밸리의 첨단 기업은 국가적 기술 로드맵을 짜는 데 힘을 보탠다. 인재를 키워내고 유치하는 데서도 민간과 정부가 한배를 탄 듯 공동 전략을 마련한다. 기후 위기나 감염병 등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도 시장과 국가가 서로의 등을 지탱하면서 보조를 맞춘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 기술 선진국을 꿈꾸는 한국도 시장과 국가의 2인 1조 체제가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 점검해야 할 때다. 더 이상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기업의 혁신만으로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얘기다.

기술 선진국의 모습은 한결같다. 수많은 혁신적 시도가 이뤄지고 스케일업하면서 창조적 파괴가 왕성하게 일어난다. 이 목표를 향한 국가적 차원의 수준 높은 기술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

"세상을 바꾼 AI 비서·mRNA백신, 모두 국가·기업 2인 1조 합작"
규제, 철폐하는 대신 기술발전 따라 업데이트해야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삼성·현대차 혼자 혁신 못해…국가도 기술경쟁 한배 타라"
한국의 발전 경험을 배우고 싶어 하는 개발도상국의 전문가들이 한국의 경제성장 그래프를 보면서 예외 없이 신기해하는 것이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친 두 차례 오일쇼크, 19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 2000년대 말 글로벌 금융위기 등 한 나라가 거꾸러질 법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반등하는 모습이다. 넘어뜨리면 다시 튀어 오르는 오뚝이 인형처럼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지만, 그 과정을 지나온 나로서도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속으로 은근한 자부심이 생기고, 늘 그랬듯 지금의 정체도 극복하고 곧 다시 뛰어오르리라는 알 수 없는 희망도 생긴다.

하지만 최근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지난 20여 년 동안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추세가 변하지 않고 있다. 최근 원화 가치만 유독 약세를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도 한국 산업의 국제경쟁력, 즉 산업의 펀더멘털이 약해진 결과로 보는 전문가가 많다. 코로나 위기가 끝났다지만 올해의 성장률도 1%대에 머물 것이 확실하다.

한 국가의 산업과 경제가 침체에 빠져 허우적대는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반대로 지속해서 성장하는 국가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혁신들이 시도되고 스케일업되면서 창조적 파괴를 겪어나간다는 점이다. 그 이면에는 시행착오를 기꺼이 무릅쓰는 수많은 기업가가 있다.

글로벌 기술혁신의 도전은 오늘도 멈추지 않고 있다. 챗GPT 등장으로 지식기반 서비스업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고, 인공지능(AI)과 생물학, 화학이 결합하면서 신약 개발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새로운 에너지 생성과 활용 기술을 꿈꾸는 과학기술자와 기업가들이 세상의 질서를 재편할 꿈으로 밤을 새우고 있다. 이런 시도가 세상의 판도를 바꿀지, 아니면 한낱 일장춘몽으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도전적 시도가 많이 이뤄지고 있는 국가가 기술 선진국으로 지속 성장하게 되리라는 점이다.

기술 선진국의 이미지를 생각하다 보면 항상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왜 우리를 놀라게 하는 혁신적 기술은 실리콘밸리에서만 탄생하는가.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또 다른 통계도 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기술기업의 40% 이상을 이민자가 설립했고, 컴퓨터 분야 고급 인재의 70% 이상이 외국 태생이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은 누구라도 실리콘밸리의 환경에 놓이면 탁월한 기업가가 된다는 뜻이다. 이는 기업가정신이 개인의 품성이 아니라 어떤 혁신환경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혁신환경을 결정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기술 선진국을 만들어 가는 데 국가의 일은 절대적이다.

일례로 세계 최초의 AI 비서 시스템인 아이폰의 ‘시리’나 코로나 팬데믹 위기에서 힘을 발휘한 mRNA 백신의 기초기술, 사이버 세상을 연 인터넷 기술은 모두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한 해답을 민간으로부터 구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그렇게 탄생한 기술이 시장에 이전돼 스케일업된 결과 지금까지 없던 혁신적 기술과 서비스가 시작된 것이다. 기술 선진국들은 지난 100년 이상 국가적인 난제를 과학기술로 풀어내기 위해 도전과제를 던져왔고, 과학기술자와 기업가들에게 문제를 풀 기회를 제공했다. 혁신 기술의 씨앗을 도전적 문제의 형태로 출제하고, 시행착오를 축적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뜀틀을 제공한 것이 국가였다. 우리의 공공부문은 과연 이런 문제를 던지고 있을까.

신기술과 관련된 규제 문제도 기술 선진국 여부를 가르는 요인이다. 세상에 없던 신약이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규제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신약은 글자 그대로 아직 없던 것이다. 개발자가 주장하는 효과를 믿을 수 있을지, 부작용은 없을지 모르는 것 천지다. 이 때문에 여러 단계에 걸쳐 조금씩 범위를 넓혀 가면서 실험하게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사용 방식과 범위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다듬어 가는 것이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적용 범위를 차차 넓혀 가고 있는 자율주행차의 규제와 기술도 똑같은 과정을 밟아가면서 상호 발전하고 있다.

규제 철폐라는 단어를 많이 쓰지만, 신기술과 관련해서 규제는 ‘업데이트해야 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신기술이 등장하면 제한된 범위에서 활용하게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적용 범위를 조정해 나가는 방식으로 규제를 끊임없이 다듬어야 한다. 이 때문에 규제 조정 과정을 이끌어가는 규제당국, 나아가 국회의 기술혁신 과정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높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상품규제지수(PMR) 평가에서 38개국 중 33위에 머물 정도로 우리의 규제 수준은 뒤떨어진 상황이다. 기술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혁신 기술을 키워나가야 할 규제당국과 국회의 수준이 충분한지 의문이다.

혁신 기술이 실험되고 스케일업돼 나가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 이때 들어가는 투자금은 시행착오의 위험을 공유하고, 지원하는 데 끈기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인내 자본’이라고 한다. 기술 선진국의 여부는 인내 자본이 얼마나 풍부한가를 보고 가늠할 수 있다. 아직 규모가 협소한 한국의 모험자본 시장과 예대마진으로 이익 대부분을 거두고 있는 우리 은행업은 인내 자본의 풀을 좁히고 있다. 자사주 소각과 배당으로 이윤을 나눠 갖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게 우리 금융시장의 현실이다. 한국의 혁신기업가들은 어디서 인내 자본을 구해야 할까.

기발한 상상력과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인재야말로 혁신의 가장 중요한 인프라다. 사람의 문제를 이야기하면 항상 등장하는 키워드가 교육이고, 국가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첨단분야가 뜨면 그 분야를 키워내기 위한 전공을 만드는 일이 데자뷔처럼 반복되고 있다. 기술 발전의 속도는 새롭게 만들어진 전공에서 학생을 키워내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가속적인 기술 발전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새로운 전공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 분야에 있는 사람이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에서 도전할 수 있도록 재교육하는 일이다. 초중고에서 대학에 이르는 제도권 교육이 아니라 대학 이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새로운 기술을 학습할 수 있는 평생학습 체제가 더 중요한 이유다. 연일 발표되는 미국 첨단기술 관련 전략에서도 빠지지 않고 항상 등장하는 키워드가 평생학습이다.

평생학습은 사회안전망 역할도 한다. 한 예로 챗GPT 등장에 따라 많은 전문직 일자리가 위험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창조적 파괴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실험을 진작함으로써 창조적 파괴를 가속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지만, 파괴의 어두운 이면을 보듬어 안기 위한 국가적 노력이 없으면 혁신의 동력은 곧 꺼질 수밖에 없다. 파괴의 열풍에 밀려나는 사람도 새롭게 도전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평생학습은 기회의 시작이다. 안타깝게도 평생학습에 쓰이는 국가 예산은 제도권 교육 예산의 2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마저도 여러 부처에 책임이 나뉘는 상황에서 밀려나는 이들은 어디서 재도전의 역량을 얻어야 할까.

국내 인재가 혁신 실험의 장으로 올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도 시급한 일이지만, 또한 해외 인재가 한국으로 모여들고 정착할 수 있도록 기반을 제공하는 것도 분초를 다투는 일이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정착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들이 쉽게 보이고, 국가적 노력으로 제도 개혁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수십 년간 거듭됐지만, 변화가 없는 것은 왜일까.

국가의 문제를 기업가의 도전 문제로 제시함으로써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인내 자본과 규제 혁신으로 도전적 시행착오를 뒷받침하며, 그 과정에 뛰어들 탁월한 인재 집단을 만들어내는 일이 곧 혁신을 위한 국가의 일이다. 도전적인 질문이 많이 시도되고, 시행착오를 축적하면서 스케일업돼야 한다는 기술혁신의 원리를 생각한다면 너무 자명한 일들이다.

우리에게 희망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첨단 반도체와 휴대폰을 생산하고, 자동차와 배터리,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신약을 보유하고 있으며, 첨단 화학 플랜트와 해양조선업을 가진 국가, 거기에 더해 우주발사체 기술을 갖추고 있으면서 첨단 전투기를 제작할 수 있는 국가는 전 세계에 미국, 중국, 일본 등에 불과하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이 그에 필적하는 넓은 산업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다.

어렵게 구축한 이 넓은 산업과 기술의 포트폴리오, 특히 물리적 제조역량은 앞으로 새로운 혁신을 실험하고 스케일업할 수 있는 귀중한 인프라가 될 것이다. 여기에 추격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운 젊은 세대의 도전정신이 합쳐진다면, 기술 선진국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는

△1967년 대구 출생
△서울대 자원공학과 졸업
△서울대 자원공학과 석·박사
△1999년~ 서울대 공과대 교수
△2018년~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2020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옥스퍼드 저널 ‘Science and Public Policy’ 편집장
△2019~2021년 대통령비서실 경제과학특별보좌관
△대표 저서 <축적의 길> <축적의 시간> <최초의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