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스타트업의 성장, 대기업 '돈 쓰는 곳' 정해져 있다 [긱스플러스]
전기차 스타트업 생태계, 충전 플랫폼·배터리 활용 주목
주유소 바꾸려는 SK·GS, ‘배터리 강자’ LG도 600억 투자

M&A가 일으킬 전기차 시장…기업 임원 ‘역학 관계’ 해결해야
2026년부터 본격적인 전기차의 ‘티핑포인트(수요 폭발)’가 시작된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국내서도 작년 말 등록 전기차 수가 39만 대를 넘어섰습니다. 전기차 생태계는 스타트업의 도전과 대기업의 투자 흐름이 조화를 이루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한경 긱스(Geeks)가 전기차 충전기 제조·운영, 전기차 배터리 활용 등 주요 영역에서 국내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합종연횡’을 조사했습니다. 최근 3년간 돈의 흐름이 가장 모인 분야입니다. 생태계 진흥을 위한 선결 과제도 함께 분석해 전달합니다.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연 50%씩 증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기차 연료비가 올랐다지만, 전기차 대중화 흐름이 끊겼다는 지표는 되기 힘들다. 세계적 컨설팅 법인 언스트앤드영(EY)은 전기차 충전요금 상승 기조를 감안했을 때 티핑포인트의 시기를 2026년으로 내다봤다. 국내서도 조짐이 보인다. 전기차 비율이 7% 이상으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제주도의 경우, 기존 정비소들의 61%가 5년 안에 폐업했다. 2030년이면 전기차 비율이 86%에 이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전기차가 관심이라지만, 그중에서도 ‘뜨는’ 분야는 정해져 있다. 스타트업이 불을 댕기고, 대기업이 자본을 쏟는 영역이 세분되고 있다. 이름을 떨친 스타트업은 일찌감치 인수합병(M&A)되거나, 대량의 투자금을 유치한다. 영향력을 이어가려는 SK, LG, GS 등 에너지와 전장 분야 대기업들은 선제적 옥석 가리기에 한창이다. 더 잠재력이 큰 스타트업, 더 핵심적인 사업을 타깃하는 업체를 파트너로 잡을수록 생존에 유리하다. 아직 시장에 ‘지배자’는 없다.

에너지·배터리의 SK, 스타트업 ‘뭉칫돈’

지난해 11월 G20정상회담 장소에 설치된 SK시그넷의 충전기. 한경DB
지난해 11월 G20정상회담 장소에 설치된 SK시그넷의 충전기. 한경DB
자금의 흐름이 눈에 띄는 분야는 충전 인프라 플랫폼이다. 대표적으로 충전기 제조와 충전소 운영이 속한다. 여기에 배터리 소재·폐배터리 재활용 등 배터리 분야가 합쳐져 양대 투자처를 이루는 모습이다. 초창기 전기트럭, 전기 슈퍼카 등 제조 업체부터 배터리 신소재 업체까지 폭넓은 투자가 있었지만, 최근엔 다양한 초기 기업에 작은 규모의 자금을 흩뿌리는 형태로 리스크를 덜어내고 있다. 대신 대규모 자금 집행은 당장의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영역으로 좁아진 모양새다. 그룹 간 기술력 차별화를 도모하기 힘들어 네트워크와 인프라 활용 싸움이 주류가 된 것이다.

전면에 나선 곳은 정유 계열사와 주유소 부지, 배터리 제조 설비를 모두 가진 SK그룹이다. 지주사 SK㈜는 2021년 5월 세계 2위 전기차 충전기 제조·운영 업체인 시그넷이브이를 인수하고, 사명을 SK시그넷으로 변경했다. 이듬해 8월엔 SK㈜와 SK에너지가 2014년 설립된 미국 스타트업 아톰파워를 1억5000만달러(2000억원) 인수하기도 했다. 2014년 설립된 아톰파워는 ‘솔리드스테이트 서킷브레이커(전력반도체로 제어되는 회로차단기) 기술을 개발해 충전 사업을 벌이는 업체다. 분산형 전력 서비스를 펼칠 수 있는 핵심 기술이다.

계열사 움직임도 활발하다. SK E&S는 지난해 대형 건물에서 충전 사업을 펼치는 미국 에버차지를 인수했다. SK네트웍스는 국내에서 충전 업체 에버온에 100억원을 투자하고, 지난해 말 급속충전기 업체 에스에스차저를 인수하기도 했다. SK그룹은 SK에너지를 통해 전국에 4200개가 넘는 주유소를 보유하고 있다. 인수하거나 투자한 스타트업은 대부분 주유소 인프라와 연계가 가능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폐배터리 분야에선 SK에코플랜트가 지난해 미국의 폐배터리 재활용 업체 어센드엘리먼츠에 5000만달러(660억원)을 투자해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배터리 제조사인 SK온과는 미국 조지아주 공장에서 배터리 순환 경제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전기차 스타트업의 성장, 대기업 '돈 쓰는 곳' 정해져 있다 [긱스플러스]

충전기 확보 전쟁…GS·현대차·롯데도 뛴다

GS그룹은 배터리 제조사를 보유한 타 그룹에 비해선 관리나 충전 등에 더 주력하는 모습이다. 배터리 기업은 그룹의 벤처캐피털 GS퓨처스가 투자하고 있다. 릴렉트리파이(배터리 재사용), 타이탄 어드밴스드 에너지 솔루션(배터리 관리), 오토그리드(에너지 분석) 등 다양한 배터리 관련 업체에 투자했는데 대부분 배터리 제작 자체와는 큰 관련이 없다.

이는 충전 인프라 확보에 더욱 주력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GS그룹은 GS칼텍스를 통해 주유소 3100개를 보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전기차 시대에 발맞춰 사용 목적을 변경해야 하는 곳들이다. GS그룹은 GS에너지, GS네오텍, 그리고 LG전자와 공동으로 전기차 충전기 업체인 애플망고 지분 100%를 지난해 6월 인수했다. 벤처업체인 전기차 충전업체 지엔텔과는 합작법인 ‘GS커넥트’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지엔텔은 국내서 8000개 상당 충전기를 보유한 사업자다. 지난해 11월에는 전기차 충전 업체 차지비를 975억원에 인수하기도 했다. 차지비는 충전기 1만 4000여대를 보유하고 있다. GS에너지는 내년까지 5만기 이상의 충전기를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스타트업 소프트베리는 지난해 현대차 제로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충전소 중심으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응용 서비스 플랫폼이다. 소프트베리 제공
스타트업 소프트베리는 지난해 현대차 제로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충전소 중심으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응용 서비스 플랫폼이다. 소프트베리 제공
나머지 그룹도 비슷한 방향으로 자금을 쏟는다. 현대차는 2015년 설립된 한국전기차충전서비스에 300억원을 유상증자하며 2025년까지 초고속 충전기 3000대를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지난해엔 액셀러레이터(AC) 조직 제로원을 앞세워 충전 플랫폼 소프트베리의 시리즈A 투자에 참여하기도 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1년 말 북미 최대 폐배터리 재활용 업체 ‘라이사이클’ 지분 2.6%를 600억원에 확보했다. 라이사이클은 같은 해 16억달러(2조1152억원) 규모로 뉴욕 증시에 상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밖에 롯데정보통신이 2021년 충전기 제조 사업자 중앙제어를 690억원에 인수했고, 최근 배터리 소재기업 포지나노의 5000만달러(660억원) 규모 시리즈C 유치에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LS일렉트릭은 벤처캐피털(VC)과 함께 전기차 충전 플랫폼 기업 플러그링크에 100억원 이상을 투자했다.

‘폐쇄형 혁신’ 종말…“신산업 임원에 권한 필요”

신산업 전환기 대기업의 투자가 몰리는 현상은 일반적이다. 대형 투자나 인수합병(M&A)일 경우 시장의 관심이 집중되지만, 스타트업 공모전이나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소액으로 투자하는 개별 건도 무수하다. 다만 흐름이 충전 플랫폼과 배터리 분야로 두드러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돈이 몰리는 스타트업의 면면도 충전기를 확보하고 있거나 기성 인프라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스타트업으로 한정됐고, 독특한 아이디어로 승부하거나 업력이 짧은 곳은 찾아보기 드물어졌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전기차 제조나 2차 전지 생산은 음극재 등 일부 영역을 제외하곤 더 이상 스타트업이 필요 없다”며 “물리적으로 기업 규모를 늘릴 수 있는 충전 플랫폼이나 배전, 이제 막 서비스를 준비해야 하는 배터리 재활용 영역 정도가 수요가 있다”고 전했다.

초창기 광범위한 영역의 스타트업에 러브콜이 들어간 것엔 대기업이 구체적인 사업 전략을 꾸리는 데 주저했다는 배경도 있다. 주요 그룹의 투자를 받았던 한 충전 플랫폼 스타트업 대표는 “접촉한 대기업 임원들은 공통적으로 전기차의 중요성에는 공감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해야 돈을 벌 수 있는지 혼란스러워했다”고 귀띔했다. 스타트업 입장에선 시너지에 대한 불안감이 존재해도, 자금을 마다하긴 어렵다. 전기차 분야는 아이디어나 기술이 뛰어나도 대규모 자본과 설비가 없으면 몸집을 불리기 힘들다 보니, 겉으론 기업공개(IPO)를 목표로 내세워도 내심 대기업을 주요 주주로 영입하거나 최종적으로 M&A를 기대하는 업체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라이벌의 전기버스. 현재 나스닥 상장 폐지 위기를 겪고 있다. 어라이벌 제공
어라이벌의 전기버스. 현재 나스닥 상장 폐지 위기를 겪고 있다. 어라이벌 제공
상황이 이러다 보니 투자나 합작 사업 실패 사례도 나타났다. 현대차는 2019년 투자한 전기차 스타트업에서 최근 1000억원이 넘는 손실을 봤다. 현대차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차는 영국에서 사업을 펼치는 전기차 업체 어라이벌 지분 1.99%에 대해 장부가액을 1036억2600만원에서 26억5600만원으로 하향했다. 2015년 창업된 어라이벌은 2021년 나스닥시장 상장에 성공했지만, 현재는 상장 폐지 위험에 시달리고 있다. LG전자는 2021년 룩소프트와 만든 자동차 전자장비(전장) 합작사 알루토의 사업을 조기 종료했다. 알루토의 대표로 선임된 전기차 충전 플랫폼 스타트업 플러그서핑 창업자 애덤 울웨이는 회사를 떠났다.

대기업이 창업자와 신사업 관련 임원을 대하는 태도 전략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통상 국내 벤처투자 회수 유형은 IPO가 30% 이상을 차지하고, M&A는 1%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산업군의 특성상 전기차 스타트업의 경우 이 공식이 깨질 가능성이 크다. 대기업도, 스타트업도 상호 간 협력의 성공 사례가 절실한 셈이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통상 자동차와 에너지 대기업은 생산과 영업 담당 인력이 실권을 쥐고,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회사와 함께하게 된 외부 창업가나 인력은 의견을 잘 피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폐쇄형 혁신’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기업 내부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현명하게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