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세계 최초로 가상자산에 대한 포괄적 규제를 시행한다. 앞으로 자격 취득자에 한해 가상화폐를 발행할 수 있고, 발행 시 주식 투자설명서와 같은 백서를 제출해야한다. 가상화폐를 통한 돈세탁, 탈세를 막기 위한 조치도 시행된다.

3년 만에 가상자산기본법 통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EU 재무장관들은 16일(현지시간) 브뤼셀에서 열린 재무장관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가상자산기본법(MiCA)을 승인했다. 2020년 발의된 법안은 지난달 EU 의회를 통과했다. 현재 EU 의장국인 스웨덴의 엘리자베스 스반테손 재무장관은 "최근의 사건들로 인해 이러한 자산에 투자한 유럽인을 더 잘 보호하고 자금 세탁 및 테러자금 조달에 암호화페가 오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규칙을 서둘러 제정해야 할 필요성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FTX 등 가상자산 거래소의 연이은 파산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된다.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내년 6월부터 2026년까지 가상자산 관련 규제가 단계적으로 시행된다. 우선 거래소와 전문 트레이더, 포트폴리오 매니저 등 가상자산 서비스 제공자는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 가상자산 발행은 자격 취득자에 한해 허용된디. 유럽에서 자격을 얻었다면 역내 27개국 어디에서든 활용할 수 있다.

가상자산 업체는 EU에서 사업하기 전 규제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구매자가 해킹 등으로 인해 보유 자산을 분실하면 업체가 책임져야 한다. EU는 이러한 규칙을 위반한 기업의 명단을 공표할 계획이다.

가상자산을 발행할 경우 '백서'도 작성해야 한다. 주식을 일반인에게 판매하기 전에 작성하는 투자설명서와 비슷한 개념이다. 발행자 또는 자산 제공자에 대한 정보는 물론, 조달 자본을 통해 수행할 프로젝트, 화폐에 대한 권리와 의무 등을 명기해야 한다.
자격증 있어야 가상화폐 발행…EU 세계 첫 가상자산 규제 시행
가상자산 거래 안정성도 강화한다. 달러 등 법정화폐와 1:1 비율로 교환할 수 있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자는 발행 자산의 100% 이상을 준비금으로 보유해야 한다. FTX 등 가상화폐 거래소가 대규모 인출로 순식간에 파산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다.

2026년부터는 미확인 계좌를 통해 가상자산을 주고 받을 경우 송금자와 수취인의 이름을 써야 한다. 가상자산을 이용한 탈세와 돈세탁을 막기 위해서다. 다만 양 측이 모두 자체 호스팅된 지갑을 사용하는 거래는 예외로 뒀다. 회원국들은 가상자산 거래 과세 정책과 최고 부유층의 사전 과세 판결에 대한 정보도 공유하기로 했다.

EU는 환경 보호를 위해 역내에서 가상자산 채굴을 전면 금지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이날 처리된 법안에는 가상자산 발행사들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보고하도록 하는 내용만 담겼다.

규제 없는 美 "EU에 뒤처질 수도"

EU가 발빠르게 가상자산 규제를 마련하면서 미국, 영국 등에서도 관련 규칙을 도입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 파생상품 규제 기관인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헤스터 피어스 위원은 지난 11일 미국이 가상자산 시장 규제가 없으면 EU와 영국에 뒤처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우리가 좋은 규제 체제를 구축하면 사람들이 올 것"이라며 "미국에 규제 제도가 없다는 것은 스스로 발등을 찍는 일"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가상자산 맞춤 규제의 도입 여부를 결정하기 전까지 증권 규제를 준용하고 있다.

영국은 스테이블코인에서 시작해 기타 암호화 자산으로 규제를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하진 않았다.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