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 에이직랜드 대표 / 사진=에이직랜드
이종민 에이직랜드 대표 / 사진=에이직랜드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의 가교 역할을 하는 디자인하우스는 업계 특성상 단방향 계약을 맺는 게 일반적이다. 보안 유출 우려가 있어서다. 때문에 한 디자인하우스가 TSMC와 삼성전자에서 동시에 물량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내 유일 TSMC 디자인하우스인 에이직랜드는 이 같은 업계 특성 때문에 TSMC와 연결된 한국의 유일한 채널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한국 기업인 에이직랜드가 TSMC 좋은 일만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한다. 이종민 에이직랜드 대표는 "반도체업의 생리를 모르는 편협한 시선"이라며 "한국 팹리스의 70%가 TSMC 공정을 이용하는데 에이직랜드마저 없으면 K-반도체의 발전 자체가 막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 대표와의 일문일답.

디자인하우스에 어떻게 발을 들였는가.

대학에서 반도체 설계를 전공했다. 졸업 후 하이닉스에 입사했지만 곧바로 사업부 매각, 임원 감원 등의 여파로 분위기가 안 좋았다. 2년 만에 사표를 내고 한 팹리스에 취업했지만 이 회사 역시 4년 만에 문을 닫았다. 막연하게 꿈만 꿨던 창업에 도전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운명적이었달까. 뜻이 맞는 후배들과 함께 디자인하우스를 제대로 해보자는 결심을 했고 2016년 회사를 창업했다.

에이직랜드는 한국 유일의 TSMC 파트너다. 어떻게 TSMC와 손을 잡을 수 있었나.

나는 삼성 출신이 아니다. 삼성 디자인하우스를 목표로 할 수도 있었겠지만 하이닉스 출신이다 보니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무조건 1등 파운드리인 TSMC 파트너가 돼야겠다고 다짐했고 TSMC 과제에만 매달렸다. 원래 디자인하우스의 고유 역할은 백엔드(Back-end) 설계 지원이다. 하지만 나는 설계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프론트엔드(Front-end) 설계까지 다해줬고 TSMC에서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TSMC에서 파트너 지위를 제안했다. 생각보다 목표가 빨리 이뤄진 셈이다. TSMC 일을 했더니 회사 규모도 커졌다. 현재 자회사 포함 160여 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창업한 이래 매출이 후퇴한 적은 없다. 지난해 매출은 660억원 정도, 영업이익은 17%가량 기록했다.
TSMC 로고 / 사진=TSMC
TSMC 로고 / 사진=TSMC

피부로 느낀 TSMC 기업 문화는 어떤가.

그들은 파운드리 천재들이다. 파운드리 마케팅, 노하우, 네트워크 등 반도체와 관련된 전 세계의 모든 정보를 다 갖고 있다. 파운드리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뜻이다. 엔지니어들 대화 수준도 다르다. 일반 파운드리는 고객 유치하기 바쁘지만 TSMC는 신뢰성을 먼저 본다. 오래 협력할 파트너가 아니라고 여기면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물량을 맡지 않는다.

일각에선 에이직랜드가 한국·삼성이 아니라 대만·TSMC 좋은 일만 해주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굉장히 협소한 시각이다. 진정한 반도체 강국이 되려면 설계자산(IP)을 많이 보유해야 한다. 그러려면 국내 팹리스 생태계 확대가 필수다. 팹리스가 성장하려면 칩을 만들어줄 파운드리가 있어야 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한국에 100개의 팹리스가 있다면 그중 70개는 TSMC를 이용한다. 삼성 파운드리 공정을 이용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삼성이 평택에 짓는 건 하이엔드(High end) 공정이지, 국내 대다수 팹리스가 이용하는 로엔드(Low-end) 공정이 아니다. 평택에 짓는 삼성 파운드리를 쓸 수 있는 국내 팹리스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퀄컴이나 삼성 정도 규모의 팹리스만 쓸 수 있다. 국내 팹리스는 28, 40, 55, 65, 90, 130, 180나노 같은 로엔드 공정을 쓴다. 삼성 파운드리 중 로엔드 공정은 28나노, 130나노 정도밖에 없다. 이것마저 삼성 설계 우선이다. 삼성은 로엔드에 투자를 안하고 있고, 또 안하는 게 맞다. 로엔드는 이미 레거시(legacy·구형) 공정인 데다 TSMC가 철옹성처럼 점유하고 있다. 삼성이 로엔드 고객(국내 팹리스) 많이 유치한다고 파운드리 점유율이 올라갈까? 그렇지 않다.
이종민 에이직랜드 대표 / 사진=에이직랜드
이종민 에이직랜드 대표 / 사진=에이직랜드

국내 팹리스가 TSMC를 이용하려면 에이직랜드가 꼭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이다. 우리마저 없으면 팹리스 스타트업이나 국내 연구소, 대학에서 설계하는 칩은 어디서 생산할 건가? 공정과 가격이 맞는 파운드리가 TSMC뿐인데 한국에 에이직랜드마저 없으면 국내 팹리스들이 어쩔 수 없이 대만 디자인하우스에 의존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보다 한국 팹리스에게 잘해줄까? 한국에 TSMC와 직통으로 연결된 에이직랜드가 있다는 건 굉장한 프리미엄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에이직랜드가 TSMC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국내 팹리스가 효과적으로 TSMC를 이용할 수 있도록 '브릿지' 역할을 하고 있다. 양산성이 없는 설계라도 TSMC를 통해 양산할 수 있도록 힘을 많이 쓰고 있다.

삼성과 TSMC의 공정 차이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달라.

예를 들어 TSMC에 파운드리 공정 종류가 10개 있다면 삼성은 2~3개에 불과하다. 미국이나 일본 팹리스는 TSMC 10개 공정 중 자신들과 딱 맞는 걸 이용해 칩을 만드는데 한국 팹리스들이 자신과 잘 안맞는 삼성 공정 2~3개 있는 걸로 생산하면 그 칩이 경쟁이 될까? 다시 말하면 TSMC를 잘 이용하는 게 한국 팹리스가 성장하는 길이다. 물론 만들고자 하는 칩에 딱 맞는 공정이 삼성과 TSMC에 동일하게 있다면 당연히 삼성 파운드리를 이용해야 한다. 근데 TSMC와 삼성이 갖고 있는 공정 종류와 경쟁력 차이가 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TSMC는 공정 종류가 훨씬 많으니 국내 팹리스가 이걸 쓸 수밖에 없고, 좋은 조건으로 이용하려면 에이직랜드가 필수다.
이종민 에이직랜드 대표 / 사진=에이직랜드
이종민 에이직랜드 대표 / 사진=에이직랜드

기업공개(IPO)를 준비 중이다.

창업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돈이다. 처음에는 아예 투자를 못 받았다. 직원은 수십 명인데 통장에 200만원 밖에 없어서 잠을 못잔 날도 많다. 시간이 지나면서 파운드리 중요성이 부각됐고 서서히 투자가 들어왔다. 최근에는 디자인하우스 중요성이 많이 알려졌고 실적도 안정화됐다. 이제 더 큰 꿈을 꿔야 한다. 해외 진출을 위해 IPO를 준비 중이다. 상장을 통해 글로벌 진출을 본격화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할 예정이다. 우선 세계 팹리스의 70%가 몰린 미국 시장을 노리고 있다. 미국 지사 설립을 계획 중이고 실무 단계에서 구체화하고 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반도체는 흐름을 한 번 놓치면 절대 못 따라간다. 일본을 보라. 반도체에서 한 번 밀리니까 계속 후퇴하지 않나. 일본이 이제 와서 TSMC, 삼성 따라잡기 위해 100조원을 투자한다고 한들 그게 될까? 절대 안된다. 그만큼 반도체는 꾸준하고 강력한 투자가 필수다. 하지만 우리 정부 지원은 너무 빈약하다. K칩스법에도 팹리스는 아예 지원 대상에서 빠져있다. 미국, 대만이 반도체 기업에 세제 혜택 주는 걸 보면 부러움을 넘어 위기감마저 느낀다. 반도체가 핵안보만큼 중요해진 시대다. 정부가 강력한 지원 정책을 펼치길 바란다.

수원=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