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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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억달러(약 33조원). 삼성전자가 2012년 이후 중국 시안 낸드플래시 공장에 투자한 누적 금액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2020년 5월 코로나19를 뚫고 시안 공장을 전격 방문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중국에 있는 반도체 공장에 대한 생산 규제를 예고하면서 삼성의 공든 탑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중국에서 첨단 제품 생산 말라”

구형 반도체만 만들라니…삼성·SK 中공장 '싸구려 기지' 전락할 판
24일 외신과 산업계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중국 반도체 공장에서 첨단 제품을 생산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앨런 에스테베스 미국 상무부 차관은 23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 경제안보포럼에서 “기업이 (중국에서) 생산할 수 있는 반도체 수준에 한도(cap on level)를 둘 가능성이 크다”며 “지금 기업들이 어떤 ‘단’의 낸드를 생산하고 있다면 그 범위의 어느 수준에서 멈추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D램 제품은 1x, 1y, 1z, 1a, 1b, 1c 등으로 구분된다. 숫자 1은 회로의 폭인 ‘10㎚(나노미터·1㎚=10억분의 1m)’를 나타내고 알파벳은 제품의 세대를 뜻한다. x에서 c로 갈수록 최신형이다. 낸드플래시는 셀(저장공간)을 수직으로 쌓은 정도를 뜻하는 ‘적층 단수’가 기술력의 척도다. 96단, 128단, 176단, 192단 등으로 구분된다.

구형 제품만 생산하면 경쟁력 저하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 공장에서 낸드플래시를 만들고, SK하이닉스는 우시 공장에서 D램을 생산한다. 두 회사 모두 ‘최첨단’ 제품은 아니지만 ‘첨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신형 반도체를 양산해 중국 업체 등에 납품 중이다. 삼성전자는 주력 제품인 176·192단보다 낮은 128단 낸드플래시, SK하이닉스는 1y·1z D램 등을 양산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에스테베스 차관의 발언대로라면 두 회사는 현재 중국 공장에서 양산하는 제품보다 고성능의 칩을 만드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지금 당장보다는 2~3년 뒤에 문제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메모리 반도체는 최첨단 제품을 효율적으로 생산해 적시에 대량공급하는 게 중요한데, 미국의 조치가 현실화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공장에서 ‘구형’ 제품을 만들 수밖에 없다.

두 회사 모두 작지 않은 규모의 손실이 예상된다. 삼성전자 낸드플래시 전체 생산량에서 중국 시안 공장의 비중은 30%대 후반이다. SK하이닉스도 2017년 추가 투자를 단행해 생산능력을 키웠다. SK하이닉스 전체 D램 생산량에서 우시공장의 몫은 48% 안팎으로 추산된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삼성과 SK의 중국 반도체 누적 투자 규모는 50조원 이상”이라며 “중국에서 첨단 제품을 생산해 현지 업체 중심으로 판매한다는 한국 기업들의 전략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반도체 ‘탈중국’ 가시화 전망

한국 기업들은 지난해부터 미국의 규제로 중국 공장이 받게 될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미국 정부가 고성능 컴퓨팅용 칩, 특정 수준 이상의 첨단 반도체 생산에 활용되는 장비의 중국 반입을 금지했지만 국내 기업들은 ‘1년 유예’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첨단 제품 생산 규제 카드를 만지작거리자 반도체업계에선 “당황스럽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한·미 정부 간 미래 기술 수준 한도 설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한 바는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미 양국은 중국 내 우리 반도체 기업이 운영 중이거나 투자를 진행 중인 생산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며 “미국 측과 포괄허가의 연장과 미래 기술 수준 설정 논의를 긴밀히 해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탈(脫)중국 전략이 가시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생산시설을 미국 테일러시에 짓고 있는 신공장에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 역시 지난해 10월 “생산 거점을 다변화하는 것은 중장기 시각에서 필수불가결하다”고 밝혔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