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한 제조업체 공장. 한경DB
수도권 한 제조업체 공장. 한경DB
충남지역 한 용기제조업체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과 함께 생산라인 작업자를 대상으로 휴대폰 수거함을 만들었다가 근로자들의 반발로 포기했다. 또 현장 안전을 위해 모든 차량에 후방센서와 사각지대용 카메라를 달았지만 직원들이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 장치를 꺼버리는 사례가 많아 무용지물로 전락했다.

지난해 1월 27일 중대재해법이 시행된 지 1년을 맞았지만 50인 이상 사업장의 사망사고는 오히려 법 시행 전보다 증가하는 등 실질적인 사고 예방 효과는 크지 않았다는 평가다. 안전 규정 위반시 사업주만 처벌하고 근로자에 대해선 이렇다할 제재수단이 없는데다 중소기업은 이 법 이행에 필요한 인력과 자금이 없어 현장에선 ‘반쪽짜리’시행에 그쳤다는 분석이다. 중대재해법상 단 한번의 사망사고라도 발생하면 사업주는 1년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여기에 법인 벌금, 행정제재,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4중 처벌이 가해질 수 있다. 중소기업 대표들은 “아무리 안전 시스템을 잘 갖춰놔도 눈깜짝할 사이에 날 수 있는 불가항력적인 사고까지 우리보고 어떻게 막으라는 밀이냐”고 하소연하고 있다.

"안 지키는 직원을 무슨 수로…" 중기 사장의 탄식

수도권 한 플라스틱제조업체 대표 역시 근로자에게 위험시 설비를 멈추라고 설명해도 잘 듣지 않자, 60개 대형 설비에 모두 자동 정지 센서를 달았다. 하지만 근로자들은 이내 불편하다며 임의로 코드를 뽑고 일하기 시작했다. 이 업체 사장은 "위험하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듣질 않는다”며 “안전 수칙을 어긴 근로자에 대해선 아무런 처벌 수단이 없고 사업주만 형사 처벌하는데 어떻게 안전이 지켜지겠나”라고 호소했다.

대구의 한 정밀부품업체는 지난해만 세 차례에 걸쳐 고용부 단속 공무원이 현장 단속을 나와 공장 업무가 여러차례 마비됐다. 이 업체 대표는 “중대재해법 때문에 한국에선 절대로 제조업을 하면 안된다고 주변에 권유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중대재해법 시행 100일 실태조사’결과, 산재사고의 가장 큰 원인으로 80.6%가 ‘근로자 부주의 등 지침 미준수’였다. 한 중대재해사건 전문 변호사는 “독일은 안전수칙을 어긴 근로자에 대해 처벌하는 등 선진국은 노사 공동 책임을 강조하는 추세”라며 “한국은 대부분 15만원 이하 과태료에 불과하고 그마저 대부분 회사가 대신 내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면피성 업무에 천문학적 서류 작업만 늘어...中企에 '중대재해'된 중대재해법

경북지역 건설업체 A대표는 출근하면 아침마다 하는 일이 전국 30군데 공사 현장에 일일히 전화를 하는 것이다. 현장소장한테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내용의 통화 녹음을 해둬야 나중에 중대재해가 발생해도 책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기업은 현장보다 서류 작업에 치중해 오히려 더 안전경영과 멀어졌다. 수도권 한 뿌리기업은 최근 생산직 근무자를 중대재해 대응 인력으로 발령내면서 오히려 사고 위험이 커졌다고 호소한다. 중대재해법을 지키려면 안전관리 계획 수립부터 평가 및 개선 작업까지 방대한 서류 작업이 필요한데, 채용 여력이 없어 현장 인력을 빼다 보니 위험한 작업을 거들 인력이 부족해진 것이다. 이 기업 대표는 “중대재해 발생 시 사업주가 구속되느냐, 마느냐가 법상 만들어야 할 서류로 판가름나다 보니 정작 현장 안전엔 소홀해지고 서류작업만 수백 장으로 늘어났다”고 하소연했다.

'위험성 평가'부담도 더해져…中企 보험가입 권유도 급증

근로자 150여 명을 보유한 수도권의 B건설업체는 올해부터 300인 이상 대기업 사업장에 의무화된 '위험성 평가'를 수행해야 할 처지가 됐다. 공사 현장의 일용직 근로자까지 일정 조건을 갖추면 상용 근로자와 동일하게 간주하는 관련 규정 탓에 일시적으로 직원 규모가 300인을 넘어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위험성 평가란 기업 스스로 유해·위험요인을 파악해 개선토록한 제도다. B건설업체는 당장 해당 업무를 수행할 안전관리 전담 직원을 구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리고 있다.

중대재해법 시행 초기 혼란을 틈탄 상술도 중소기업을 상대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중소기업 근로자들도 하루에도 수 차례 사무실로 걸려오는 보험 가입 권유 전화에 속앓이하고 있다. 대체로 직원 1인당 3~5만원의 재해·사망 보장 보험에 가입해두면 산재 사고 발생 시 회사 대표의 처벌을 경감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실제 사고 발생 시 지급하지 않는 사례가 많고, 단순 보험 가입 사실로는 처벌을 피하기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외국인 근로자 안전 교육 지원' 손 놓은 고용노동부

외국인 근로자가 많은 중소기업 현장일수록 혼란은 가중되는 양상이다. 수도권 한 중소제지업체 대표는 “과거 큰 화재를 겪은 후 곳곳에 CCTV를 설치했는 데, 외국인 근로자들이 왜 감시를 하냐며 인권 침해라고 반발했다"며 "또 동남아시아에서 온 근로자들은 슬리퍼를 신는 게 습관화가 돼 안전화를 잘 안신는데 설득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한 뿌리기업 대표는 “단순 작업을 하는 국내 외국인 근로자(E9비자)가 20만명에 달하는 데, 이들과의 소통 문제로 안전 교육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 대표들이 많다”며 “고용노동부가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등 국가별 언어로 산업안전 교육이라도 시켜준 적이 있느냐”고 지적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