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산업을 쥐고 흔드는 애플, 엔비디아, AMD 등의 최고경영자(CEO)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기업이 있다. 대만의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업체 TSMC다. 6일(현지시간) TSMC의 애리조나 공장 장비 반입식에 참석한 팀 쿡 애플 CEO 등은 “TSMC가 없으면 우리도 없다” 등의 용비어천가급 축사를 쏟아냈다. 어디 가서 자존심 굽힐 필요 없는 미국 일류 기업의 CEO들이 TSMC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뭘까.
‘슈퍼 갑’ 애플도 고개 숙이는 TSMC
TSMC는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가 설계한 칩을 주문대로 만들어주는 파운드리업체다. 고객 체형에 따라 디자인한 양복을 딱 맞게 제작하는 재단사처럼 고객사가 원하는 기능의 칩을 적시에 생산하는 게 파운드리 경쟁력의 척도다.

1987년 사업을 시작한 TSMC는 단순히 고객의 요청대로 반도체를 만들어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축적한 생산 노하우를 활용해 고객사의 설계에 ‘플러스 알파’를 더하는 데 주력했다.

이뿐만 아니다. TSMC는 역량 있는 후공정(반도체를 기기에 부착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 업체까지 연결해주며 고객사에 한 차원 높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같은 기술·서비스 경쟁력을 앞세워 TSMC는 시장점유율 53.4%(올 2분기 기준)로, 파운드리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품질을 꼼꼼히 따지고 여차하면 ‘납품가 후려치기’로 유명한 애플도 유독 TSMC 앞에선 큰소리를 못 친다. TSMC가 없으면 자사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칩의 경쟁력이 낮아질 수 있어서다. 엔비디아, AMD 같은 반도체 큰손들도 TSMC에 “우리 제품을 생산해달라”고 읍소한다. TSMC가 반도체업계의 ‘슈퍼 을’로 불리는 이유다.
“TSMC 없으면 우리도 없다”
원래 TSMC의 기본 생산 전략은 ‘자국 내 생산’이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가 지켜온 원칙이다. 기술 노하우 유출을 막고 근면한 대만 근로자들을 생산시설에 투입해 고성능 칩을 생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반도체가 전략물자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최근 2~3년간 미국 정부는 ‘메이드 인 USA’ 반도체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압박을 못 이긴 TSMC는 2020년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170억달러를 들여 파운드리 공장을 신축하기로 했다. 이날 열린 이 공장의 장비 반입식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등 미국 정관계 고위급 인사들과 팀 쿡 애플 CEO,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 리사 수 AMD CEO 등 반도체업계 거물들이 참석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TSMC의 칩은 세계 최고”라며 “미국의 제조업이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CEO들도 TSMC를 치켜세우기에 바빴다. 젠슨 황은 TSMC에 대해 “반도체 회사 그 이상의 기적을 이뤄내는 기업”이라고 평가했고 리사 수는 한술 더 떠 “TSMC 없이는 우리 사업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팀 쿡은 “TSMC의 미국 공장에서 제조된 칩을 구매하는 첫 고객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내부에선 “미국 공장 실익 없다”
TSMC도 화답했다. 이날 마크 리우 TSMC CEO는 “120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400억달러까지 늘리겠다”며 “공장도 하나 더 지을 것”이라고 밝혔다. 공장에 구축하는 생산 라인도 5나노미터(㎚·1㎚=10억분의 1m)에서 4㎚ 공정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2026년부터는 3㎚ 공정에서 칩을 생산할 계획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TSMC 고위 경영진의 속내는 복잡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의 러브콜에 화끈한 투자를 결정했지만 업황 악화에 대한 우려를 떨칠 수 없는 상황이다. 최근 반도체 수요가 꺾이며 UMC, 글로벌파운드리즈 같은 3~4위권 파운드리업체들은 투자 축소와 인건비 절감에 나섰다. 업황 부진이 지속되면 TSMC에도 대규모 투자가 부메랑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