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기아의 조(兆) 단위 국내 투자가 노동조합에 가로막혀 표류하고 있다. 미국 유럽 등의 적극적인 투자 유치에도 경기 화성에 전기차 전용 신공장을 짓기로 했지만, 노조가 ‘공장 규모가 작다’며 착공을 막고 있는 것이다. 국내 자동차산업의 미래를 좌우할 투자까지 노조 허락을 받아야 하는 나라라는 자조 섞인 비판이 회사 안팎에서 나온다.

6일 업계에 따르면 기아는 이날 화성공장장 명의의 공문을 노조 화성지회에 발송해 신공장 건설 협의 마무리와 사전공사를 요청했다. 회사 측은 “그동안 신공장과 관련해 14차례나 협의를 진행했음에도 진척이 없어 전체 사업 계획에 차질이 우려된다”며 “노사 모두에 주어진 시간이 결코 많지 않다”고 밝혔다. 기아 노사는 ‘고용안정소위원회’를 지난 2월부터 14차례 열었지만 노조는 여전히 착공을 반대하고 있다. 노조는 △공장 생산 규모 연 20만 대로 확대(회사 측 15만 대) △신공장 내 파워트레인 모듈공장 추가 배치 △외주화한 차체·도어 공정 내재화 등을 요구하며 이달 특근을 거부하는 사실상의 부분파업을 벌이고 있다. 기아 화성공장장은 최근 협의에서 사전공사 지연에 따른 문제점에 대해 수차례 설명했다. 그러나 노조 측은 “사측의 답변이 부족하다”며 “공사를 지연시키는 것은 오히려 사측”이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아는 지난 2월 신공장 계획을 확정 짓고 내년 3월 착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기존 계획은 어그러질 전망이다. 6조3000억원을 들여 미국 조지아에 짓는 전기차 공장이 부지 확정부터 착공까지 3개월이 채 걸리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다.

전기차 전환도 딴지거는 기아 노조
"위탁생산 맡길 협력사 M&A 하라"

화성 신공장 착공을 가로막으며 이달 특근을 거부하는 사실상의 부분파업을 벌인 기아 노동조합은 광명2공장의 전기차 라인 전환에도 딴지를 걸고 있다. 기아는 광명오토랜드 2공장을 전기차 전용공장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내년 하반기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지만 판매 중인 차종의 차후 생산 방식에 관한 노조와의 협의가 변수다.

현재 광명2공장에서는 소형차인 스토닉과 프라이드를 생산하고 있다. 국내용은 공사 전 단종이 유력하지만 인기가 여전한 수출용 차량을 협력사 동희오토에서 위탁생산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노조는 동희오토 위탁생산에 대해 “단체협약 위반”이라며 벌써부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기아 단협에서는 ‘생산 외주는 노사 의견이 일치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차량을 단산할 경우에도 노조에 통보하고 노사 의견이 일치돼야 시행할 수 있다는 조항이 명시돼 있다. 사측으로선 단종도 외주화도 쉽지 않다. 스토닉 등 기존 차량 생산을 두고 노조와 협의하지 못하면 광명2공장의 전기차 라인 전환도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

최근 사측에 스토닉 단종·프라이드 외주화가 단협 위반이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노조는 동희오토에 대한 인수합병(M&A)까지 요구하고 있다. 기아 노조는 소식지에서 “동희오토를 기아 법인으로 통합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며 “(M&A가 성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산업계에선 이 같은 노조 이기주의가 국내 제조업 기반을 갉아먹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자국우선주의로 인해 신규 공장 투자가 시장이 있는 외국으로 향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성노조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국내 투자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자동차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국GM과 르노코리아 등은 국내 공장에 전기차 생산을 유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국내 노조는 하겠다는 전기차 투자마저 가로막고 있다”며 “국가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국내 제조업의 붕괴는 누가 책임지느냐”고 꼬집었다.

국회에 계류 중인 노조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노조의 힘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개정안은 현재 근로 조건과 관련한 사항으로 제한하고 있는 쟁의행위 범위를 기업 M&A, 채용 등 경영상 결정으로 확대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박한신/김형규/김일규 기자 p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