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運命, 윤석열의 宿命 (Feat. 화물연대)
· 운명(運命) : 앞으로의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
· 숙명(宿命) : 날 때부터 타고난 정해진 운명.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

국어사전에 나와있는 '운명'과 '숙명'의 뜻풀이입니다. CHO Insight 뉴스레터에 웬 운명, 숙명타령인가 싶으실텐데요. 다름아닌 화물연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6일 기준 13일째를 맞은 화물연대의 '파업(집단 운송거부)'는 윤석열 정부의 예상치 못한 강경대응으로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화물연대, 나아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으로서는 정부가 업무개시명령에 이어 유가보조금 지급 중단,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등 이렇게까지 초강경 모드로 나올지는 전혀 가늠치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하지만 이번 화물연대 파업에 있어 정부의 대응은 이미 예견된 수순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른바 '노무현·윤석열의 평행이론' 또는 '윤석열에 비친 노무현의 데자부'라고 얘기되는 대목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1년에 출간한 책 '운명'에서 2003년 5월 화물연대 파업과 관련, 이렇게 썼습니다.(2003년 당시 문 전 대통령은 청와대 민정수석)

“당시 대통령(노무현)은 화물연대가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부산항 수출·입을 막아 주장을 관철하려는 방식에 화를 많이 냈다”며 “내게 단호한 대응을 지시했고, 군 대체 인력 투입도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부산항 수·출입 화물의 육로 수송률이 절대적이고, 철도에 의한 수송 분담률이 얼마 되지 않는 상황에서 단호한 대응이 불가능했다. 결국 화물연대 파업은 합의 타결됐다. 말이 합의 타결이지 사실은 정부가 두 손 든 것이었다.”

“화물연대로선 대성공을 거뒀다. 사회적 지위도 높아지고, 조합원도 크게 늘었다. 그런데 그 성공에 도취했는지 그로부터 두세 달 후(8월)에 2차 파업을 했다. 딱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던 1차 파업과 달리 무리한 파업이었다. 정부도 온정으로만 대할 수 없었다. 법과 원칙대로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화물연대 지도부는 구속됐다. 보다 근본적 제도개선을 위해 정부와 이뤄지고 있던 대화도 끊겨 버리고 말았다.”

어떤 단어에 눈에 띄셨는지요? 문 전 대통령이 언급한 '법과 원칙' 대응의 결과는 바로 업무개시명령 제도였습니다. 2004년 그렇게 만들어진 제도가 18년이 지나 윤석열 정부에서 발동된 것이지요.

서두에 '운명'과 '숙명'을 언급한 것도 이처럼 놀랍도록 유사하게 진행되는 노무현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모습 때문입니다. 현 정부 입장에서는 집권 초기부터 '법과 원칙'을 수차례 천명해온 터인데다가 현재 민주당의 뿌리인 노무현 정부에서 만들어준 '칼'은 더없이 좋은 선택지였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혹자는 '노무현의 운명, 윤석열의 숙명'이 아니라 '노무현의 숙명, 윤석열의 운명'이라고 불러야 한다고도 합니다. 두 단어 공히 명(命)에 관한 단어이지만, 운명은 스스로 운전할 여지가 있고, 숙명은 자신이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찌됐건 역대 어느 정부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 민주노총에 대한 초강경 대응이 지금까지는 효과를 보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대응이 노정관계 파국이 아닌 선순환하기 위해서는 '출구전략'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노사관계에 정통한 한 원로 경제학자의 말입니다. "이번 화물연대 파업 사태는 정부가 향후 5년, 아니 그보다 멀리 노동개혁 성공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제대로 된 토대를 세우려면 단발성 강경대응을 넘어 유사한 파업에 대한 일관된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백승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