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업계의 붕괴와 함께 암호화폐 시세도 ‘미끄럼틀’을 탔다. 글로벌 암호화폐거래소 FTX의 파산 전만 해도 2만달러를 웃돌던 비트코인은 1만7000달러까지 주저앉았다. 그동안 과도한 레버리지로 수익을 내온 암호화폐 대출업체들이 연쇄 파산하면서 알트코인 시세도 추락하는 분위기다. FTX의 ‘회계 부정’ 사태에 실망한 기관투자가들이 암호화폐에서 손을 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내에서는 게임사 위메이드의 암호화폐 위믹스가 ‘유통량 부풀리기’를 이유로 거래소에서 일제히 상장 폐지되는 등 허위 공시 리스크도 불거졌다. 금리인상 속도 조절 가능성을 시사한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의 발언에 소폭 반등하긴 했지만 여전히 하방 압력이 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시장에 드리운 제네시스 먹구름

FTX가 출금을 중단한 지난달 8일 이후 비트코인은 2만800달러에서 1만7000달러까지 18.2% 내렸다. 특히 8~9일 이틀간 하락폭만 24.3%에 달했다. 이더리움(-31.5%)을 비롯한 알트코인은 같은 기간 하락폭이 더 컸다.

FTX에 엮인 업체들이 대부분 암호화폐 대출업체였다는 게 1차적인 이유로 꼽힌다. 이들 업체는 투자받은 암호화폐를 담보로 대출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파산한 FTX의 자회사 알라메다리서치와 역시 부도 처리된 블록파이, 출금을 중단한 제네시스글로벌캐피털 등이 비슷한 구조다. 과도한 레버리지를 일으켜 암호화폐 시세를 부양해온 만큼 거품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제네시스글로벌캐피털은 최근 암호화폐 도미노 붕괴의 핵심 축으로 꼽힌다. 루나·테라 사태로 12억달러 손실을 본 데다 FTX로 2억달러의 자금을 또다시 날렸다. 이 업체가 파산을 신청하면 125억달러에 달하는 암호화폐 대출이 상환 수순을 밟게 된다.

FTX 여파가 여기서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제네시스의 모회사 디지털커런시그룹(DCG)은 또 다른 자회사 그레이스케일이 운용하는 그레이스케일비트코인신탁(GBTC)에 13조원어치의 비트코인, 4조7000억원어치의 이더리움을 맡겨놨다. 암호화폐 정보 플랫폼인 쟁글은 “이 정도면 시장을 가라앉히고도 남을 물량”이라며 “제네시스의 자금난을 해소하지 못하면 GBTC의 해체 시나리오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암호화폐 평가 플랫폼인 메사리의 라이언 셀키스 최고경영자(CEO)도 “DCG는 암호화폐 생태계에서 시스템적으로 가장 중요한 회사 중 하나”라며 “일단 제네시스에서 발생한 10억달러의 ‘구멍’을 메워야 ‘전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인 테더가 내준 USDT 대출이다. 테더 재단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기준 USDT 대출액은 61억달러(전체 자산의 9%)에 달했다. 지난 6월 파산한 셀시우스네트워크는 비트코인을 담보로 USDT 대출을 받았다. 그런데 암호화폐 급락으로 대출을 떼인 데다 담보가치가 급락하면서 투자자들에게 USDT를 1 대 1로 현금으로 돌려줄 자산이 충분한지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픽 = 이정희 기자
그래픽 = 이정희 기자
기관투자가들이 암호화폐 시장을 대거 이탈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최근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투자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코인베이스에 대한 투자의견을 ‘매수’에서 ‘중립’으로 하향 조정하며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구체적으로 △FTX 파산으로 암호화폐에 대한 신뢰 붕괴 △다른 업체에 대한 여파 가능성 △암호화폐의 제도권 진입 지연 등이다.

미국 벤처업계의 ‘큰손’인 세쿼이아캐피털과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 삼성전자의 자회사 삼성넥스트 등도 FTX 투자로 큰 손실을 입었다. 래리 핑크 블랙록 CEO는 “FTX에 2400만달러를 투자했다”며 “암호화 기술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대부분의 암호화폐 기업은 우리 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해니 레다 영국 파인브리지인베스트먼트 매니저는 “암호화폐가 전략적 자산 배분을 위한 잠재적 자산으로 인식됐지만 상황이 달라졌다”고 했다. 로스틴 베넘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장은 FTX 청문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법행위를 포괄하기 위해 상원에 발의된 ‘디지털상품 소비자보호법을 재검토해야 한다”며 “FTX가 제대로 된 규제하에 있었다면 이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탓에 최근 투자사들의 전망은 ‘비관론’ 일색이다. 루나·테라 사태 때도 낙관론을 유지해왔던 니콜라스 파니기르초글로우 JP모간 투자전략가도 “FTX 사태로 비트코인이 1만3000달러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예측했다. 마크 모비우스 모비우스캐피털 창업자는 “내년에도 고금리 수준이 유지될 가능성이 큰 만큼 1만달러까지 추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다시 부상하는 규제 리스크

국내에서도 암호화폐의 제도권 진입을 앞두고 진통이 잇따르고 있다. 개별 암호화폐의 법적 성격부터 문제가 되고 있다. 가령 위믹스는 ‘투자계약증권’이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였다. 투자계약증권으로 판명나면 금융감독원의 증권신고서 심사를 거쳐 유가증권시장에서 거래돼야 한다.

허위 공시도 고질적인 리스크로 꼽힌다. 위메이드는 당초 유동화된 위믹스 물량이 없다고 공시했지만 금감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올라온 위메이드 분기보고서에는 위믹스 토큰 유동화에 따른 선수수익(1460억원)이 반영돼 있었다. 이는 이번 위믹스 상장 폐지의 핵심 사유로 작용했다.

암호화폐를 맡겨 예금처럼 수익을 내는 ‘스테이킹’은 여전히 인기가 많지만 문제도 적지 않다. 업비트와 코인원, 코빗의 이더리움 2.0 스테이킹은 이더리움을 맡겨도 언제 돌려받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다. 예치 기능을 포함한 머지 업그레이드에 상환 기능이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년으로 예정돼 있었지만 무기한 보류된 상하이 업그레이드가 진행돼야만 이더리움 원리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 빗썸 스테이킹 서비스 대상인 크로노스도 홍콩계 거래소 크립토닷컴의 자체 발행 코인이어서 리스크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FTX가 FTT를 발행해 자회사에 팔고 이를 담보로 대출받은 돈으로 또다시 FTT를 사들이는 자전거래로 시세 조종에 나섰던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다. 크로노스는 2일 낮 12시 기준 0.064달러로 한 달 전에 비해 41.98% 급락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선 ‘암호화폐가 사라지도록 내버려둬야 한다(let crypto burn)’는 칼럼을 내 주목받기도 했다. 스테픈 세체티 전 국제결제은행(BIS) 통화경제부문 이사와 킴 쇤홀츠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명예교수는 이 칼럼에서 “암호화폐 규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억눌러야 한다”며 “실제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스템에 정당성을 부여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