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산업재해 예방 체계를 현재의 ‘처벌’ 위주 규제에서 ‘자기 규율’ 방식으로 전환한다. 노사가 함께 사업장 내 위험 요인을 진단·개선하는 ‘위험성 평가’ 제도를 의무화하고, 산업안전법령도 핵심 규정 위반만 처벌하도록 정비한다. 규제·처벌 위주의 행정은 기업이 처벌을 모면하는 데 급급하게 만들어 산재 예방 능력을 오히려 퇴보시킨다는 판단에서다.

○300인 이상 기업, 위험성 평가 의무화

중대재해, 규제·형벌→노사자율로…예방 노력땐 처벌수위 낮춘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3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번 로드맵은 1974년 ‘로벤스 보고서’를 토대로 규제·처벌 대신 자기 통제 방식으로 전환해 산재율을 크게 낮춘 영국을 모델로 삼았다. 고용부는 로드맵을 통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4위 수준인 산재사망 만인율(1만 명당 사망자 수)을 2026년까지 OECD 평균(0.29명)으로 떨어뜨린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위험성 평가 중심의 자기 규율 예방체계 △근로자 참여 통한 안전의식 확립 △산업안전 거버넌스 재정비 △중소기업 등 중대재해 취약 분야 집중관리 등 4대 전략을 추진하기로 했다. 우선 2013년 도입됐지만 유명무실했던 ‘위험성 평가’를 산재 예방 핵심 수단으로 삼는다. 위험성 평가란 노사가 함께 사업장 내 유해·위험 요인을 스스로 파악하고 ‘개선책’을 수립·이행하는 제도다. 위험성 평가를 소홀히 한 사업장에서 발생한 재해는 강력하게 처벌하되 평가를 철저히 한 경우에는 처벌을 완화한다. 평가 내용은 재해 발생 시 검찰의 구형, 법원의 양형 판단에까지 반영토록 한다는 계획이다. 당장 내년부터 300인 이상 기업에서 위험성 평가를 의무화하고 중소기업은 2024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한다. 시행하지 않는 경우 시정명령·과태료를 통해 강제한다.

무려 679개에 달하는 산업안전 관련 규정은 단순화한다. 또 산업안전보건규칙을 ‘처벌 규정’과 ‘예방 규정’으로 분류해 필수 핵심 규정 위반만 처벌하고 선택적 사항은 예방 규정으로 전환한다. 고소(높은 곳) 작업의 경우 ‘추락 방지 조치’를 위반하면 처벌하지만 난간·안전대·안전망 설치 등 세부 방지 방안은 기업이 선택할 수 있도록 고시·가이드 형태로 제공한다.

○근로자도 안전 책임 의무

중대재해처벌법 처벌을 완화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상습·반복적으로 재해를 일으킨 사업장은 일벌백계한다는 대원칙은 유지한다. 다만 처벌을 과징금으로 전환하거나 신체 구속형 대신 가급적 벌금형으로 다스리는 방안을 검토한다. 이를 위해 내년 초 ‘산업안전보건법령 개선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킨다.

근로자에게도 안전 수칙 준수 의무를 부여하는 내용의 산안법 개정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반복적으로 안전 수칙을 위반한 근로자를 제재할 수 있는 ‘표준 안전보건관리규정’을 내년까지 기업에 보급한다. 안전모 착용 등 관리자의 안전 관련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사업장 차원에서 징계가 가능해진다.

위험을 감지한 근로자가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작업중지권’도 활성화한다. 현행 작업중지권은 명확한 발동 기준이 없어 노사 갈등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나와 매뉴얼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그 밖에 근로감독관의 작업중지 명령도 급박한 경우엔 산재 발생 전에 내릴 수 있도록 확대한다.

경제계는 위험성 평가 의무화 등이 옥상옥 규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위험성 평가를 강제하는 것은 중대재해법 준비도 안 된 중소 사업장에 또 다른 규제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곽용희/안대규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