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장벽' 된 RE100…"재생에너지 확대 불가피"
국내 배터리 제조업체 A사는 미국과 유럽의 완성차 업체로부터 납품 조건으로 ‘배터리 제조 과정에서 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요구받았다. A사는 물론 A사의 협력사까지도 제품 생산 전 과정에서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쓰라는 것이다. 화석연료를 쓸 경우 그만큼 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라도 사들여야 한다. A사는 국내에선 납품 조건을 맞추기 어렵다고 보고 해외 공장을 중심으로 납품을 계획하고 있다.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이 새로운 무역장벽이 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RE100에 참여하면서 납품업체에도 동참 압박을 가하는 사례가 늘면서다. 지난달 삼성전자의 RE100 참여 선언도 고객사와 투자사의 요구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은 이미 RE100에 참여하고 있다.

실제로 환경 규제는 이미 무역장벽 역할을 하고 있다. 24일 산업통상자원부와 국가기술표준원이 낸 ‘2021 무역기술장벽(TBT, 비관세장벽) 연례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세계무역기구(WTO)에 통보된 각국의 환경 분야 TBT는 총 542건으로 전년 대비 34% 이상 증가했다. 전체 TBT의 21%가 환경 분야다. 한 에너지 분야 전문가는 “어떤 에너지로 만든 제품인지가 중요해지면서 기후 변화에 대한 국가·기업별 대응 능력이 새로운 무역장벽이 되고 있다”며 “RE100도 그런 사례”라고 말했다.

RE100은 생산에 쓰이는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쓰자는 캠페인이다. 재생에너지에서 원자력 발전은 제외된다. 영국 비정부기구(NGO) 클라이밋그룹이 2014년부터 주도하고 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380여 개사가 참여를 선언했고 국내에서도 25개 기업이 가입했다. 2020년 SK㈜, SK텔레콤, SK하이닉스 등이 참여했고 지난해 LG에너지솔루션, 아모레퍼시픽 등이 가세한 데 이어 올해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기아, 네이버 등이 참여 기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국제적으로 탄소중립과 함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확산하는 데다 RE100 참여 기업이 늘면서 재생에너지 수요는 계속 커지고 있다. 하지만 국내 발전량 중 재생에너지 비중은 지난해 기준 6.3%에 불과하다. 이는 독일(40.6%), 영국(40.9%), 유럽연합(26.6%), 미국(12.9%) 등은 물론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12.5%)보다도 작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국내 재생에너지 공급량이 불안정하다고 느끼는 건 사실”이라며 “한국전력 등에서 대규모로 안정적 공급방안을 확보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풍력, 태양광 업체들은 각종 입지 규제와 인허가 제약으로 재생에너지 공급에 속도를 내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일부 지역에서 재생에너지와의 전력 계통망 연계가 지연되는 것도 문제다.

환경부는 “공급 안정성이 부족한 재생에너지의 한계를 보완하는 인프라가 조속히 구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선 재생에너지가 제때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면 재생에너지 가격이 치솟고, 기업 간 재생에너지 확보 경쟁이 심해지면서 기업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도 재생에너지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관건은 속도다. 환경부는 RE100 참여 기업 증가 전망 등을 고려해 재생에너지 비중을 속도감 있게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상협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위원장은 “재생에너지와 원전의 균형 있는 발전이 중요하다”고 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