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정보기술(IT)업체인 삼성전자에 메모리 반도체는 든든한 뒷배 역할을 했다. 많게는 연 45조원가량의 영업이익을 거두며 곳간을 채웠다. 삼성전자는 이 돈을 바탕으로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미래를 준비했다.

최근 메모리사업에 경고등이 켜지면서 한국 반도체산업 전체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파운드리와 팹리스 등이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한 상태에서 메모리 실적이 급감하며 ‘투자 여력’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메모리는 쫓기고 파운드리 성장은 더디고…K반도체 '경고등'

좁혀지는 메모리 기술 격차

9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지난 3분기 대만 TSMC에 매출 세계 1위를 내준 건 한국 반도체산업의 암울한 상황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TSMC는 파운드리 시장의 압도적인 경쟁력을 앞세워 3분기에 27조원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삼성전자가 1위 자리를 내준 결정적인 이유는 반도체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메모리 업황 악화다. 지난 9월 D램 고정거래가격은 지난해 고점 대비 30% 이상 빠졌다.

시황 산업인 메모리 반도체의 특성상 1·2위 기업도 ‘가격 하락 사이클’을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그동안 경쟁 업체보다 2~3년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경쟁사 대비 실적 변동성을 최소화했다. 최근엔 쉽지 않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일본 등 경쟁 업체와의 기술 격차가 좁혀지고 있어서다.

D램에선 미국 마이크론이 올해 5세대 10나노급 제품을 양산하겠다고 공언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내년 양산’을 선언했고 SK하이닉스는 아직 ‘개발 중’이다. 낸드플래시에서도 마이크론은 232단 연말 양산을 약속했지만 삼성전자는 내년에 양산에 들어갈 236단 제품을 최근 공개했다. 업계 관계자는 “트랜지스터 밀도, 수율(전체 생산량에서 양품의 비율), 신제품 출시 시점 등은 기술력의 척도”라며 “한국 기업들이 기술 경쟁에서 위협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팹리스, 선두권과 격차 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편중을 낮추기 위해 시스템 반도체 산업 육성에도 주력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9년 ‘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고 200조원 가까운 돈을 투자하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고객 맞춤형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시황에 덜 민감하고 안정적인 게 장점으로 꼽힌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파운드리에서 삼성전자는 TSMC의 높은 벽에 막혀 ‘만년 2위’에 갇혀 있다. 팹리스사업 역시 통합칩셋(SoC), 이미지센서 등에서 외부 고객을 늘리고 있지만 ‘선두권과의 격차가 상당하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반도체 특별법 빨리 통과돼야”

미국이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규제하기로 한 것도 불안 요인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20조원 이상을 투자해 낸드플래시 공장 두 곳을 건설했다. 이 공장의 낸드플래시 생산 비중은 삼성 생산량의 40% 수준이다. SK하이닉스도 우시에 최첨단 D램 생산시설을 구축했다.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의 경쟁력은 ‘최신 제품을 적시에 고객사에 공급하는 것’이다. 최첨단 장비 반입이 제한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면 제품 생산 속도가 느려질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TSMC처럼 특화된 시장에서 꾸준히 실적을 낼 수 있는 ‘압도적인 기술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 지원도 필수 요건으로 꼽힌다. 하지만 반도체기업의 시설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 확대 등이 담긴 반도체특별법은 국회에서 표류 중이다. 업계 고위 관계자는 “특별법에 담긴 세제 혜택도 선진국의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라며 “이마저도 통과되지 않고 있어 답답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