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9월 29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비즈니스 세션에서 거버너 연설을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9월 29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비즈니스 세션에서 거버너 연설을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지금과 1997년, 2008년은 완전히 다르다. 한국에서 경제위기가 재현될 가능성은 ‘매우매우’ 낮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연차총회에 참석해 이 같이 말했다. 그는 “한국은 외환보유고도 많기 때문에 (IMF외환위기와 같은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본다”며 “미국, 일본 등 해외에서도 한국의 외환 상황에 대해 굉장히 건전하고 문제가 없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단기적인 외환 시장 불안보다는 오히려 “중국의 저성장으로 올 수 있는 영향에 더 유의하는게 맞다”는 게 추 부총리의 생각이다.

추 부총리의 이 같은 상황 진단을 두고 시장의 상황은 엇갈린다. 정부가 최근 환율 방어에 나섰음에도 외환보유액은 8월말 기준 4364억달러에 달한다. IMF외환위기가 터졌던 1997년 말 204억 달러에 비해선 20배가 넘고, 2008년 금융위기가 오기 전인 2007년 말 2622억에 비해서도 2000억 달러 가량 여유가 있다. 원·달러 환율은 2009년 이후 13년 만에 심리적 저지선인 1400원대를 뚫었지만, 한 나라의 통화가 다른 나라 통화에 비해 갖고 있는 실질적인 가치를 보여주는 실질실효환율 기준으로 보면 원화 가치는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안심하긴 이르다는 게 상당수 전문가들과 과거 경제 위기 극복 과정에 참여했던 경제관료들의 생각이다. 환율 상승에 따른 가격 경쟁력 상승이 무역수지 흑자로 이어지며 회복을 도왔던 과거 위기와 달리 올해는 중국의 경기 둔화와 에너지 가격 상승이 맞물리며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년 사이 10%대에서 50%로 뛴 국가부채비율은 위기가 현실화됐을 때 과연 정부가 예전처럼 돈을 과감히 풀어 경기 부양에 나설 수 있을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중 분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G20과 같은 국제 공조 체제가 사실상 무너졌다는 점도 걱정거리다.

2022년 위기의 결론은 어떻게 날까.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와 지금은 무엇이 다른지, 위기를 촉발할 가능성이 있는 내·외부 요인들은 무엇이 있는지 점검해본다.

○외환보유액 204억→4631억달러로 증가

국가경제의 ‘안전판’ 역할을 하는 외환보유액을 비롯한 대외 건전성은 과거에 비해 확실히 튼튼해졌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 204억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액은 2008년 금융위기를 앞둔 2007년 말엔 2622억달러로 늘었고, 작년 말엔 4631억달러에 달했다. 국내총생산(GDP)대비 비율로 따져봐도 각 시점마다 3.7%, 22.4%, 25.8%로 꾸준히 개선됐다.

대외 부채가 자산보다 많았던 과거 위기와 달리 현재 한국의 대외순자산 규모는 6월말 기준 7441억달러에 달한다. 1997년말 한국은 대외순자산 645억달러 적자, 2007년말에는 1889억달러 적자 상태였다. 대외 부채가 더 많았던 과거엔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자 많은 기업과 금융회사들이 이를 상환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은 달러가 강세를 보일수록 국내 기업와 투자자들이 가진 달러 표시 자산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

해외 경제 당국과 신용평가사들도 한국의 대외건전성이 대외 불확실성에 대응해나가기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달 30일 열린 추 부총리와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과의 컨퍼런스콜에서 옐런 장관은 한국의 대외건전성 수준에 대해 양호한 외화유동성 상황과 충분한 외환보유액 등에 힘입어 견조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IMF외환위기 직전 A+등급이었던 한국의 국제신용등급(S&P기준)은 위기가 본격화하자 1997년 12월 B+까지 급전직하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엔 위기 발발에도 20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와 통화스와프 등 국제공조를 바탕으로 A등급을 유지했다. 한국의 신용등급은 2016년 이후 과거보다 높은 AA등급을 유지하고 있다.일본과 중국은 같은 기준으로 각각 A+등급에 그치고 있다.

정부는 2010년 도입한 △선물환 포지션 규제 △외환건전성 부담금 △외국인 채권투자 과세제도 등 소위 ‘거시건전성 3종 세트’를 통해 급격한 외환 유출입을 억제했다. 2015년에는 은행 외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을 도입해 민간 은행이 충분한 외화 유동성을 확보하게 했다. 외화 LCR은 위기 상황에서 향후 30일간 예상되는 외화 순현금 유출액대비 현금화가 용이한 고유동성 외화자산의 비율을 뜻한다. 현재 규제 비율은 80%인데, 8월 기준으로 외화 LCR은 124.1%에 달했다.

과거 두차례 위기와 달리 지금은 전 세계적인 ‘강(强)’달러 현상으로 실질적인 원화 가치가 거의 떨어지지 않은 것도 정부가 위기 재발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이유 중 하나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8월말 기준 한국의 실질실효환율은 100.21로 기준점인 2010년(100)과 큰 차이가 없었다. 과거엔 명목 환율 상승과 함께 실질실효환율이 1998년 1월 72.32, 2009년 2월엔 83.58까지 떨어졌다.

실질실효환율은 교역상대국과의 물가 변동과 교역량이 반영된 환율로, 명목 환율에 비해 자국 통화의 대외구매력과 자국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지표다. 원·달러 환율이 무섭게 치솟고 있지만 원화의 구매력 하락은 과거에 비해 제한적이란 게 정부의 생각이다. 추 부총리는 “과거 두 차례 경제 위기로 한국은 환율 급등은 곧 외환위기, 경제위기로 보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며 “하지만 대외건전성 관련 상황은 판이하게 다르다”고 말했다.

○어려워진 경상수지 V자 반등

전문가들은 당장의 환율 변동보다는 중국의 저성장과 탈세계화에 따라 분리된 공급망, 과도한 국가부채 등 위기 극복의 장애물이 될 경제 환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세계은행 수석연구위원 출신으로 2008년 초대 금융위원장을 맡았던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지금 상황은 과거에 비해 좋은 점도 있지만 회복의 관점에서 보면 더 어렵고 도전적”이라며 “중국의 고성장이 끝나가고 있고 재정이나 부채도 2008년보다 나빠져 경기 살릴 실탄 여력이 줄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과거엔 G20과 같은 국제 공조를 통해 위기를 함께 극복했지만 지금은 각자도생 시대가 됐다”며 “뉴노멀(새로운 기준·New Normal)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과거 위기 때와 같은 반등이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1997년과 2008년 한국은 그해 상당한 폭의 경상수지 악화를 겪고 바로 이듬해 대규모 흑자로의 전환에 성공하며 환율 안정을 되찾았다. 1997년 경상수지가 108억달러 적자를 기록한 한국 경제는 이듬해 환율 상승에 따른 가격 경쟁력 강화 효과를 타고 무역수지가 390억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401억달러에 달하는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2008년에도 17억달러로 경상수지 흑자 폭이 쪼그라들었던 것이 2009년 330억달러로 ‘V’자 반등에 성공했다. 2009년 한국의 무역수지 흑자는 404억달러에 달했다.

경상수지는 외국과의 상품, 서비스의 거래와 외국에 투자한 대가로 벌어들이는 배당금, 이자 등의 소득 거래 등을 합산한 통계다. 크게 상품수지, 서비스수지, 본원소득수지, 이전소득수지 등 4개 항목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상품수지가 무역수지와 연동된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지금은 반등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한국은 지난 4월 이후 6개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 상태에 빠져있다. 올해 누적 무역수지 적자는 288억8000만달러로 역대 최대 적자를 기록한 1996년(206억달러)보다도 많다.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통화 가치가 떨어지다보니 한국 제품의 수출 경쟁력 제고 효과보단 수입 비용 증가가 더 크게 다가오는 상황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올해 무역수지 적자 규모를 480억달러로 내다봤다.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지난달 3대 에너지원인 원유·가스·석탄을 수입하는데만 179억6000만달러가 들었다. 작년 동월 대비 81.2% 늘어난 수치다. 새로운 주력 산업으로 떠오른 배터리 등을 만들기 위한 리튬, 니켈 등 광물 원료 수입도 구조적으로 늘고 있다.

북미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세액공제를 부여한다는 내용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같은 보호무역주의 조류가 높아지면서 기업들의 해외 생산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과거와 같은 환율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이유다. 1997년 39억1000달러에 불과했던 해외직접투자 금액은 2008년엔 240억2000만달러로, 2021년에는 758억7000만달러로 늘었다. 한국 기업의 생산·판매 지역이 다변화되면서 환율 변동에 따른 리스크도 줄었지만, 회복력도 제약되는 셈이다. 이에 대해 추 부총리도 “과거엔 한국에서만 생산해서 수출을 했는데 지금은 부품 등 중간재를 해외에서 가져와서 수출하는 게 많다”며 “우리 경제구조가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

악화된 국가재정도 한국의 위기 회복력을 제약하는 요인이다. 1997년 11.1%, 2008년 26.8% 수준이었던 한국의 GDP대비 국가부채비율은 올해 49.8%로 높아졌다. IMF외환위기 직후인 2002년 464조7000억원에 불과했던 가계신용 규모는 현재 1862조원 수준으로 4배 가량 늘었다. 전 이사장은 “인플레이션이 안정화돼 재정이 경기를 살리는 역할을 해야 할 때 실탄 여력이 떨어져 있다는 의미”라며 “금리 인상의 부담도 과거보다 훨씬 안 좋다”고 지적했다.

○“중국 저성장·국제공조 붕괴 등 리스크 더 커”

세계 경제 환경은 한국에 더 큰 도전과제를 던지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중국의 저성장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인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아시아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1999년에도 7% 중후반대를 기록했다. 2003~2007년엔 10%를 넘겼던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에도 9~10%를 기록하며 경제 위기의 ‘무풍지대’처럼 보였다. 하지만 2015년 이후 6%대로 떨어진 중국의 성장률은 올 상반기 2.5%로 급락했다.

1991년 냉전 붕괴 이후 세계화 추세를 타고 글로벌 경제에 편입된 중국은 값싼 인건비를 무기로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며 높은 성장을 구가해왔다. 하지만 미·중 무역분쟁이 심화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세계가 마치 과거의 냉전과 유사하게 세계 경제가 자유민주진영과 사회주의진영으로 분리되면서 중국의 성장을 견인해온 세계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문제는 한국 경제의 중국 의존도가 크다는 점이다. 2021년 기준 한국의 대중 수출의존도는 25%에 달했다. 2019년 한국은행 분석 결과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1%포인트 증가할 때 한국의 수출은 0.29%포인트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은 “그간 한국의 경제 성장은 미국의 원천 기술과 한국의 중간재, 중국의 제조로 이어지는 밸류체인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며 “급변하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움직임 속에서 한국의 역할을 분명하게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 단위의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 공조 시스템이 과거에 비해 약화된 것로 커다란 리스크(위험) 요인이다. 1970년대 석유파동(오일쇼크)가 터지자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당시 민주진영 선진국들의 모임인 G7이 만들어졌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계기로 국제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해선 보다 폭넓은 국가 간 조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1999년 9월 IMF연차총회에서 지금의 G20 창설이 이뤄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론 장관급 회의에 머물렀던 G20이 정상급 회의로 격상됐다. G20 정상회의는 국제공조로 조율된 재정ㆍ통화정책, 신흥개도국에 대한 외화유동성 공급 확대, 무역·투자 분야 신규장벽 동결 합의를 통한 보호주의로의 회귀 방지 등 노력을 통해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를 완화하고 예상보다 빠른 세계경제의 회복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지금은 미·중 마찰과 전쟁 등 여파로 과거와 같은 국제 공조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급속도로 금리를 올리는 미국과 이로 인한 자국 통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한 세계 각국의 금리 인상이 있따르는 ‘역환율전쟁’이 사실상 전개되고 있지만 이렇다할 국제 공조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IMF 수석이코노미스트를 지낸 모리스 옵스펠드 미국 UC버클리 교수는 최근 한국을 찾아 “각국이 경쟁적으로 통화가치를 절상하면 서로 생산품 가격이 높아지며 인플레이션을 수출하고 경기는 둔화되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 빠질 수 있다”며 “각국 당국이 국제공조를 통해 조율된 정책을 내놔야 하는데 지금은 이런 공조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황정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