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지배구조 다시 보기
삼성생명 서초타워에서 열린 제2기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첫 번째 정기회의에서 이찬희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삼성생명 서초타워에서 열린 제2기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첫 번째 정기회의에서 이찬희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근 들어 국내 각계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열풍이 거세다. 기업 현장에서 ESG 경영에 대한 관심에 고조되면서 법무법인과 회계법인도 ESG 관련 조직을 보강하며 다양한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ESG 평가기관은 국내외적으로 이미 수백 개에 달하며, 심지어 정부도 ESG 관련 표준을 만들어 공표했다.

그러나 ESG 관련 논의의 내용을 뜯어보면, 공급망에서 아동노동 방지 등 일부 사회(S) 분야에 대한 논의가 있지만 기후변화 또는 탄소중립 관련 논의가 거의 압도적이다. ESG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약자인데, 국내에서는 E에 대한 논의만 활발할 뿐 G에 대한 언급은 거의 전무하다.

ESG에서의 거버넌스는 기업 지배구조를 의미하는 것은 자명한데, 왜 ESG를 논의할 때는 G에 대한 언급이 없을까. 한국에서 기업 지배구조라고 하면 대부분 기업 집단 내 계열사 간 지분 관계를 떠올린다.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은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의 지분 처리 문제고,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은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는 문제로 이해한다. 그런데 ESG에서의 G는 이사회, 감사기구, 임원 보상, 내부 통제 같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G가 한국식 지배구조인 계열사 간 지분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면 한국에서의 ‘지배구조’와 ESG에서의 ‘G’는 어떤 관계일까.

모기업만 상장미국의 단일기업 체제

미국 기업은 대부분 단일기업 체제(stand-alone 또는 free-standing style)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상장기업은 최상단에 하나만 존재하고, 각 사업 부문은 해당 상장기업의 사업부 또는 100% 자회사 형태로 존재한다. 상장기업인 제너럴일렉트릭(GE)은 많은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지만, 모두 비상장이고 대부분 100% 자회사다. 서학개미들이 아무리 구글 주식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다. 구글은 상장기업인 알파벳의 100% 자회사이기 때문이다. 계열사인 유튜브가 비상장임은 물론이다. 오래된 가족 기업인 월마트의 경우도 상장기업은 월마트 하나뿐이고, 샘스클럽을 운영하는 계열사도 모두 100% 자회사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모회사의 이사회와 감사 기구가 경영진에 대한 적절한 견제와 감시 기능을 수행하는 지배구조 체제가 성립한다. ESG에서 G는 이러한 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들 자회사의 이사회에는 사외이사도 필요 없다. 중요한 점은 단일기업 체제에서는 자회사 간 거래에 대해 부당성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한 자회사의 손해는 다른 자회사의 이익이고, 모회사 주주 입장에서는 자회사의 손익이 상쇄되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국내 기업은 대부분 기업 집단(business group) 형태다. 삼성전자라는 개별 기업은 삼성그룹이라는 기업 집단 소속이고, 현대차라는 개별 기업 역시 현대차그룹이라는 기업 집단 소속이다. 이러한 기업 집단은 단일 상장회사가 아니라 대개 복수의 상장회사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기업 집단 소속 회사 중에서는 지배주주(총수)의 지분이 높은, 거의 개인회사 성격을 띠는 계열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계열사 간 거래 조건이 공평한지, 회사가 할 수 있는 사업을 지배주주 개인회사가 하는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한 판단이 중요해진다. 지배주주와 일반주주의 이해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지배주주가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일반주주의 이익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도 이러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G’ 빠진 ESG…한국에서 지배구조 논의가 필요한 이유


‘지배구조’ 용어의 혼란…투자자 보호가 핵심

한국에서 말하는 ‘지배구조’는 영어로는 거버넌스(governance)보다는 지배권(control)에 더 가깝다. 지배권은 기업 내부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기업을 지배하고 통제할 것인가의 문제인 반면, 거버넌스는 투자자 입장에서 어떻게 경영진을 견제하고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다. 즉 거의 정반대 의미를 지닌 지배권과 거버넌스가 국내에서는 모두 ‘지배구조’로 동시에 번역되다 보니, 여러 가지 혼란이 야기되는 것이다.

다시 ESG 관점에서 보면 E와 S의 목표는 비교적 명확하다. E의 목표는 탄소배출 축소, 자원 재사용 등을 통해 지구온난화 등 기후변화를 억제하는 것이다. S의 목표는 종업원, 협력업체, 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G의 목표는 무엇인가. 전통적으로는 G의 목표는 주주를 중심으로 한 투자자 이익의 보호다.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안드레이 슐라이퍼(Andrei Shleifer)와 로버트 비슈니(Robert Vishny)(1997)에 따르면 기업 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란 ‘기업에 자금을 공급한 투자 주체가 투자(수익)금을 회수할 수 있도록 하는 제 수단’으로 정의된다.

미국의 경우 주주 중심주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 폐해가 지적되었고, 이에 따라 ESG 관점에서는 E와 S의 목표 내지 목적성이 강조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G의 수단성에 주목한다. 반면 한국은 주주 중심주의를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ESG를 강조하는 전문가들이 강의 첫 슬라이드에서 흔히 ‘주주자본주의의 종말’을 언급하는데, 이는 미국의 이야기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주주자본주의 종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물며 한국은 주주자본주의를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기에, G의 목표로서 투자자 보호는 여전히 강조되어야 하는 핵심 목표로 봐야 한다.

그러면 국내의 투자자 보호는 어떤 수준인가? K-콘텐츠가 미국의 주요 상을 휩쓸 정도로 국격이 높아졌지만, 불행히도 이 분야에서만큼은 민망한 수준이다. 2020년 기준 아시아 기업 지배구조협회의 평가에 따르면 한국의 ‘지배구조’ (지배권이 아닌 거버넌스) 수준은 아시아 12개국 중 9위에 불과하다. 흔히 한국의 ‘지배구조’가 낙후되었다고 할 때 지배권l 개념을 염두에 두고 순환출자 등 계열사 간 지분구조를 떠올리는데, 우리가 9등밖에 하지 못한 것은 결코 순환출자 때문이 아니다. 거버넌스가 안 좋다는 것은 전반적으로 투자자 보호가 안 좋다는 것과 거의 동일한 의미다.
 이관휘 서울대 경영대 교수가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모자회사 쪼개기 상장과 소액주주 보호' 토론회에서 발제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이관휘 서울대 경영대 교수가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모자회사 쪼개기 상장과 소액주주 보호' 토론회에서 발제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지배주주와 일반주주의 이해가 충돌할 때

K-거버넌스의 핵심적 문제는 지배주주와 일반주주의 이해 상충에 따라 주주 간 n분의 1 원칙이 무너지고, 지배주주가 본인의 비례적 권리를 초과하는 사익을 일반주주로부터 편취하는 주주 간 부의 이전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사익 편취가 없는 경우의 기업가치를 V라고 하고, 사익 편취 규모를 d라 하고, 지배주주의 지분율을 α라고 하자. 이 경우, 지배주주의 목적함수는 α(V-d)+d다. 반면, 시가총액은 더 이상 V가 아니고 V–d로 주어진다.

지배주주 입장에서는 V를 향상시킴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도 있다. 이 경우는 일반주주와 이해가 일치하기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V를 키우지 않더라도 지배주주는 d를 더 많이 가져가는 방식으로 이익을 취할 수 있다. 이 경우는 일반주주와 지배주주의 이해가 완전히 충돌한다. d가 클수록 시가총액 V-d는 기계적으로 줄어든다. 바로 이것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 원인이다. 심지어 비상장 상태에서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증세법)에 의해 상속세를 계산하면 너무 높게 나와, 이를 낮추기 위해 상장을 하고 주가를 의도적으로 낮추는 경우도 있다. 상장 이후 창업주가 당당하게 ‘이번에 엑시트(exit)했다’고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같은 일반주주로부터의 사익 편취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가장 대표적 방식은 (상장 이전부터) 계열사에 납품하는 중간재 제조업체를 지배주주 개인회사로 운영하거나, 계열사로부터 통행세를 징수하는 판매업체를 지배주주 개인회사로 운영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지금도 국내에서 상장을 추진하는 경우 이러한 특수관계인 거래가 있으면 상장이 보류된다. 따라서 상장하는 시점에서는 이러한 거래를 정리해야 한다. 문제는 일단 상장되면 이러한 거래가 다시 복구되더라도 아무런 제재가 없다는 점이다.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인 공시대상기업집단 및 10조원 이상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의 경우 공정거래법에서 특수관계인에 대한 부당한 이익 제공 금지(총수일가의 사익 편취 금지) 조항을 통해 이를 일부 행정적으로 규제하지만, 일반 상장기업의 경우는 일단 상장하면 특별한 제재가 없다. 거래소에서 매출액의 5% 이상 규모의 특수관계인 거래는 공시하도록 하고 있으나, 매출 1000억원 이상인 기업이 50억원 미만 단위로 쪼개 복수의 지배주주 개인회사와 거래하는 경우는 공시로 파악되지도 않는다.
한국투자자연합회 회원들이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앞에서 ‘대기업 물적분할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한국투자자연합회 회원들이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앞에서 ‘대기업 물적분할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E와 S 추구가 G 훼손해선 안돼

미국의 경우 이 같은 지배주주 개인회사와의 거래를 통해 상장기업 일반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면 주주들이 바로 집단 소송을 제기하고 법원이 이 같은 거래는 용인하지 않을 것을 미리 예상하기에 이러한 거래는 발생하지 않는다. 주주 간 n분의 1 원칙이 비교적 충실하게 지켜지는 것이다. 반면, 우리의 경우 법원에 의한 민사적 구제는 아직은 요원한 실정이다. 우리 법원에서 흔히 원용하는 소위 ‘경영판단의 법칙’은 미국 법원에서 발전된 법 논리지만, 이의 적용을 위해서는 ‘이해 상충의 부재’를 전제로 한다.

즉 이해 상충이 있는 상황에서는 경영 판단의 법칙을 적용할 수 없고,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가 우선한다는 것이 미국 법원의 일관된 판례다. 그런데 한국에서 민사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안은 전부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간 이해상충 문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경영 판단 법칙’을 적용할 수 없음에도 우리 법원은 이를 계속 적용하고 있다.

LG화학의 배터리 사업 물적 분할 당시 필자는 한 인터뷰에서 ‘그럼 구글은 바보라서 유튜브를 상장 안 시키는가’라고 반문한 바 있다. 구글이 몰라서 유튜브를 상장시키지 않는 게 아니고, 핵심 사업을 따로 떼어 상장시킬 경우 직면해야 할 알파벳 주주로부터의 집단소송 등 법적 문제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도 2000년대 후반부터 복수 상장에 따른 주주 간 이해 상충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고, 완전 자회사화 및 합병을 통해 이를 완화하는 추세다. 대표적 사례가 NTT와 자회사인 NTT 도모코의 완전 자회사화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계열사 복수 상장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계속 진행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은 G(투자자·주주중심주의)에 대한 경험 없이 E·S로 급격히 점프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ESG의 의미는 G를 활용한 E·S 추구에 가깝고, 런던 비즈니스 스쿨의 에드먼스 교수도 저서 <파이코노믹스(Pieconomics)>에서 이러한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 ESG 경영이 국내에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향후 E·S의 추구가 G의 훼손을 대가로 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상장은 엑시트가 아니라 n분의 1을 할 각오가 되어 있을 때 추진하는 것이다. 지배주주도 상장 이후에는 더 이상 ‘오너’가 아니라 ‘스튜어드(steward)’라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