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투자자들이 올해부터 본격 시행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BEPS(소득 이전을 통한 세원 잠식) 방지협약’에 대비해 정부가 적절한 세법 개정 조치를 하지 않아 적어도 수조원을 해외에 세금으로 추가 납부할 위기에 처했다. 연기금·공제회부터 해외에 투자한 개인 및 법인까지 광범위한 주체들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가 즉시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1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국내 대형 A연기금은 BEPS 방지협약 중 ‘역혼성단체 방지 규정’ 시행으로 올해부터 늘어나는 세금 및 대응 전략을 컨설팅해 달라고 최근 국내 B회계법인에 의뢰했다. A연기금은 자문 결과가 나오는 대로 기획재정부 등 관련 부처와 국회에 세제 개편을 요청할 계획이다.

역혼성단체란 동일한 조직을 놓고 국내와 해외에서 법률적·세무적 해석이 다른 경우를 뜻한다. OECD는 역혼성단체가 탈세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방지하는 각국의 세법 및 조세협약 개정을 권고했고, 각국은 개정 절차를 완료하고 올해부터 본격 규제에 나선다.

문제는 국내 투자자 및 기업이 대체투자 등의 목적으로 해외에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이 현 상태에선 무더기로 역혼성단체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해외에서는 SPC를 단순히 이익을 자국으로 이전하는 ‘도관(파트너십) 조직’으로 인정하지만 국내엔 이와 명확히 일치하는 규정이 없어 ‘해외법인’으로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역혼성단체에 작년까지 과세하지 않았지만 올해 1월부터는 25% 안팎의 세금을 물리기로 했다. 미국은 역혼성단체에 배당소득세를 최대 15%로 감면해주던 국가 간 조세조약을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이르면 올해부터 최대 30%를 세금으로 매긴다는 계획이다.

한 대형 회계법인 회계사는 “정부가 내년도 세제개편안에 해외 SPC를 도관 조직으로 명확히 간주할 수 있는 조항을 넣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민연금과 한국투자공사(KIC)가 해외 대체투자로 벌어들인 이익만 각각 18조원, 10조원이다. 조속히 해법을 찾지 못하면 수조원의 국부가 해외로 유출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상황을 파악 중”이라고 말했다.

차준호 기자 cha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