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연합뉴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연합뉴스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2003년 '카드 사태' 때 남겼던 명언입니다. 정부가 민간 기업과 시장에 개입하는 관치가 예나 지금이나 별 좋을 게 없는데도 김 전 위원장은 오히려 관치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이 발언으로 커다란 논란을 빚었지요.

물론 김 전 위원장이 이런 말을 했던 데 나름의 이유와 배경은 있습니다. 김 전 위원장은 우리 경제의 주요 고비 때마다 '대책반장' 역할을 맡으며 해결사 노릇을 했습니다. 1990년 5·8부동산 특별대책반장과 1993년 금융실명제 대책반장, 1995년 부동산실명제 총괄반장, 1997년 한보 사태 대책반장, 1999년 대우 사태 대책반장, 2003년 카드 사태 대책반장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 때문에 '영원한 대책반장'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지요.

카드 사태만 보더라도 당시 금융감독위원회(현 금융감독원) 감독정책1국장이었던 김 전 위원장은 각 은행별로 (법적 의무도 없는) 돈을 걷어 부실 금융사에 투입했고 가장 문제가 컸던 LG카드(현 신한카드)는 아예 산업은행에 넘기는 식으로 구조조정을 마무리했지요. 그가 금융위원장에 오른 이후인 2011년 '저축은행 사태' 때도 부실 저축은행을 각 금융지주사나 대기업 등에 하나둘 떠넘겨 해결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장 기능이 거의 망가진 상황에서 '소방수' 역할을 해야 했던 김 전 위원장에게 어쩌면 관치금융은 '필요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강력했던 김 전 위원장의 리더십은 지금까지도 그가 '모피아의 대부'로서 금융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입니다.

모피아(MOFia)란 옛 재정경제부의 영문약자(MOFE·Ministry of Finance and Economy)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로 경제·금융 관료 출신 인사들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모피아의 일원인 고승범 현 금융위원장도 관치금융 논란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저축은행 사태' 당시 금융서비스국장을 맡아 구조조정 실무를 총괄했던 그는 지난해 금융위원장 취임 직후 집값 안정 및 가계대출 억제를 위해 각 은행별로 대출 총량을 강제 할당하는 '극약 처방'을 사용하기도 했지요.

이복현 금감원장도 최근 은행의 '이자 장사'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였지만 과거 관치금융과 또다른 풍경이어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지난달 20일 은행장들과 첫 간담회에서 "(은행들의) 지나친 이익 추구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고 질타하자 은행들이 일제히 예금금리를 올리고 대출금리를 내린 것입니다. 30일에도 보험사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나 "대출 금리가 합리적으로 산출되는지 살펴봐달라"고 주문했지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30일 보험사 최고경영자(CEO) 간담회에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30일 보험사 최고경영자(CEO) 간담회에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 원장의 공개 발언 이외에 정작 금감원 실무진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이 관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제 이준수 금감원 은행담당 부원장보는 "금감원이 은행에 금리를 올리라 마라 한 적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며 "엄밀한 의미에서 시장 개입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즉 금융사들이 이 원장의 공개 비판을 수용하고 스스로 '자기 검열'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는 사상 최초의 검찰 출신 금감원장이라는 배경과 '윤심복심'이라고 불릴 만큼 두터운 윤석열 대통령의 신뢰와 지지도 작용하고 있겠지요.

다행스러운 건 취임 초 이 원장의 겸손하고 소탈한 태도와 적극적인 소통 의지가 금융권 안팎에서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 지난 30일 간담회에 참석했던 한 보험사 CEO는 "(이 원장이) 90도에 가까울 만큼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사적인 얘기도 스스럼 없이 털어놓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전했습니다.

이 원장도 자신의 말 한 마디가 신(新) 관치금융으로 비쳐질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겁니다. 취임 후 자신에게 쏠린 금융권과 언론의 관심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만큼 공개 메시지 관리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이고 시장의 오해가 없도록 대내외 소통을 강화해 주길 기대해 봅니다.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