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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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오는 12일 창립 72주년을 맞이합니다. 한은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2년 뒤인 1950년 6월12일 설립됐습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창립 기념일을 이틀 앞두고 열린 기념식에서 한은 직원들에게 "서로 존중하면서도 업무에 관한 한 '계급장 떼고', '할 말은 하는' 조직문화를 만들어 조직 내 집단지성이 효율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하자"고 당부했습니다.

조직의 수평적 소통을 중시하는 이 총재의 철학은 국제통화기금(IMF) 근무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한국인 최초로 IMF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을 지낸 그는 IMF 근무 시절 수평적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IMF 내 총재와 10여명의 주요 국장만 참석하는 메시지 미팅에서는 비판적인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했다고 합니다.

이 총재는 IMF 근무 초반에는 회의에서 직접적인 비판은 피하고, 당시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에게 따로 의견을 전달했다는데요. 라가르드 총재는 이 총재에게 "동양적인 문화에서는 직접 의견을 개진하거나 비판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안다"면서도 "회의에서 의견을 내지 않으면 동료들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후 이 총재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고, 수평적 소통이 업무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걸 몸소 체감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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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재는 기념사에서도 "구성원 간 소통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며 "어느 직급이든 격의 없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토론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때로 상사의 업무지시가 불명확하거나 비합리적일 수 있다"며 "그런데도 상사에게 다시 물어보거나 다른 의견을 건의하기보다 윗사람의 생각을 짐작해서 그에 맞추려고 애쓰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는 일이 벌어지고는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그래서는 업무의 효율성을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기피적인 직원이 창의적인 직원을 구축하는 역선택이 일어날 것임은 너무나 자명하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인 실천 방안도 제시했습니다. 이 총재는 "부서장이 주제를 제시하고 실무자가 이를 문서화한 이후에야 논의를 시작했던 업무 방식을, 이제는 글을 쓰기 전에 충분히 난상 토론을 벌인 후 모인 중론을 문서화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보자"며 "저 또한 조사역이 저와의 점심 자리에서 '지난번 총재님 연설문은 실망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경직된 위계질서를 없애는 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총재는 한은의 연구 보고서가 수요자 중심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이 총재는 "한은 정책서비스의 최종 수요자는 팀장도, 국장도, 총재도 아닌 바로 외부의 경제주체들이라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라며 "수요자 중심의 '고객 마인드'가 없다 보면 아무리 많은 보고서를 만들어도 외부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찾지도 않는 내부용 보고서에 그치고 만다"고 했습니다.

이어 "한은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행여 정책적 함의나 대안 제시가 불러올 논쟁을 피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현황에 대한 단편적, 기술적 분석으로만 끝내려는 경향은 없었는지 자문해 보자"며 "수요자가 원하는 내용을 엄밀히 분석하고 정책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은이 정책당국으로서뿐 아니라 국가 경제의 씽크탱크로서의 위상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총재는 개인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평가하는 문화도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총재는 "과감하게 권한을 하부 위임해 개개인이 자기 책임하에 본인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이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 보자"며 "앞으로는 직원 개개인의 인사자료에 그간 근무한 부서뿐 아니라 그 부서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보고서를 작성했는지 개인의 구체적인 성과를 기록해, 평가정보가 보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총재는 "본인의 역량 제고는 한은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짐은 물론이고 향후 한은 밖에서도 인정받는 자산 축적이 되어야 한다"며 "한은에서만 쓰일 수 있는 인적자본(human capital) 육성이 아니라 개개인의 시장가치(market value)를 높이는 방향으로 경력관리와 전문성 강화를 지원함으로써 개인의 발전에 조직이 디딤돌이 되어 줄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총재는 특히 간부들의 노력을 당부했습니다. 그는 "조직혁신이 결실을 맺기 위해 위아래 직급 모두가 같이 노력해야 한다"며 "간부 직원들은 변화를 수용하려는 열린 자세로 솔선수범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위에서부터 바뀌어야 그 바람이 아래까지 파급될 수 있다"며 "이번에는 조직이 정말로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앞장서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 총재는 "이러한 변화를 위한 노력에 저부터 앞장서겠다"며 "제 방의 문은 항상 열어놓겠다.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것 외에 또 다른 아이디어가 있으면 서슴지 말고 말씀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