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주간 다이아몬드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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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중국을 견제하는 경제안보법을 확정해 외교와 국방 뿐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미국의 편에 설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핵심 동맹국인 미국과 최대 교역국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요구받는 일본 기업들은 미·중 생산체계를 분리하는 블록화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다.

12일 일본 미디어들에 따르면 일본 참의원(상원)은 전날 본회의를 열어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가결했다. 일본 정부는 법률 공포 등의 과정을 거쳐 2023년부터 경제안보법을 단계적으로 실시할 계획이다.

◆시총 100대 기업 41%, 中 비중 10% 넘어

경제안보법은 공급망 강화, 핵심 인프라 안전 확보, 첨단기술 연구개발 지원, 특허 비공개화 등 네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전반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려는 성격이 강한 법률이란 분석이다.

반도체와 희토류, 축전지, 의약품 등 특정 중요물자의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일본 정부는 기업의 원재료 조달처와 재고현황을 조사하는 권한을 갖는다. 기업에 핵심물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계획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할 수도 있다.

기업이 제출한 계획서가 타당하면 보조금을 지급하고, 불충분하면 공급망 재편 등 보완 계획을 요구한다. 2030년이면 세계 시장 점유율이 '제로(0)'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자국 반도체 산업을 부활시키기 위한 지원대책도 담았다.

전력과 통신, 금융 등 14개 핵심 인프라 업종의 기업이 중국산 기기와 시스템을 사용하는지에 대해서도 사전 심사한다. 5000억엔(약 4조9225억원) 규모의 기금을 만들어 인공지능(AI)과 양자컴퓨터 등 최첨단 기술 개발을 정부가 지원한다.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만엔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벌칙조항도 마련됐다.

기업 활동을 제약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지만 미국과 영국 독일 프랑스는 이미 도입한 제도다. 일본은 뒤늦게 보조를 맞추는 모양새다. 경제안보법을 마련한 계기 자체가 미국 정부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미국은 패권경쟁을 벌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민주주의 동맹국끼리 공급망을 구축하는 법안을 각국에 요청했다.

일본의 경제안보법 제정이 늦어진 것은 최대 교역상대국인 중국과의 관계와 자국 기업의 손실 가능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2020년 기준 중국은 일본 수출입 총액의 23.9%를 차지하는 제1 무역상대국이다. 2위 미국(14.7%)과 3위 한국(5.6%)을 합친 것보다 비중이 크다. 일본의 시가총액 100대 기업 가운데 41%는 중국 매출이 1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안보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일본은 경제 분야에서도 서방 쪽에 설 것을 확실히 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미중 긴장이 군사 분야 뿐 아니라 경제 분야로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상 최고 실적 도요타, 주가 4% 급락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망을 재편하는 것은 일본으로서도 중요한 과제다. 일본 대표 기업의 실적이 타격을 받고 있어서다.

전날 도요타자동차는 2021년 영업이익이 36% 늘어난 2조9956억엔으로 일본 제조업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도 이날 도쿄증시에서 도요타 주가는 4.4% 급락했다.

도요타의 지난해 영업이익이 최고치를 기록한 것보다 올해 영업익이 20% 줄 것이라는 회사 전망을 투자자들은 더 크게 받아들였다는 분석이다. 지난 10일 도요타는 부품 공급에 차질이 빚어져 일본내 8개 공장, 14개 라인의 가동을 6일간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5월 생산대수가 75만대에서 70만대로 줄게 됐다.

지난 10일 닌텐도는 반도체 부족의 여파로 2021년 가정용 게임기 닌텐도스위치 판매량이 20% 줄었다고 밝혔다. 닌텐도스위치의 판매량 감소는 2017년 발매 후 처음이다. 닌텐도는 판매 감소로 인해 올해 순익이 3400억엔으로 30% 가까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소니도 지난해 콘솔형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5의 판매량이 1150만대로 1480만대였던 당초 목표보다 20% 부진했다고 발표했다. 닌텐도와 마찬가지로 반도체 부족이 원인이었다.

2010년 영토분쟁 중인 센가쿠열도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중국 어선의 충돌 사건을 계기로 중국이 희토류 수출을 금지한 이후 일본은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일본 기업의 중국 현지법인 종업원수는 2015년 162만명에서 2019년 130만명으로 감소했다. 미중 무역마찰이 본격화한 2020~2021년 일본 기업의 중국 기업 인수·합병(M&A)은 56% 급감했다.

◆美·中 생산체계 분리하는 블록화 전략

그럼에도 2010년 26조4985억엔이었던 교역량이 2020년 32조5898억엔까지 늘어나는 등 중국 의존도는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경제안보법 성립으로 일본 기업들은 이제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양자택일을 요구받게 됐다. 미국이 반도체 등 자국산 핵심 부품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는 한편 중국 제품의 수입도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빠른 일본 기업들은 벌써부터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을 내놓고 있다. 핵심 전자부품인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세계 1위 무라타제작소는 최근 "세계 경제의 미중 양극화에 대응하는 생산체제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무라타는 재료부터 생산설비 구축, 제조까지 전 과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일관생산 사업모델을 갖고 있다. 생산설비의 65%가 일본에 집중돼 있어 글로벌 공급망 정체의 영향을 별달리 받지 않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자사의 일관생산 체제를 중국에 하나 더 만들어 미국의 수출입 규제에 대응한다는게 무라타의 구상이다. 무라타는 매출의 58%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 의존도가 15%인 일본 최대 공조회사 다이킨공업도 제품의 생산 체계를 미국 등 서방 국가와 중국 등 2개로 분리하는 블록화에 나서기로 했다.

반도체 제조장비 부품업체인 펠로테크홀딩스는 중국 현지법인 등 자회사 4곳을 3년에 걸쳐 상하이와 선전거래소에 상장하기로 했다. 일본 기업의 자회사가 아니라 중국 상장기업의 지위를 얻어 본사는 미국과 유럽, 자회사는 중국을 담당하는 이원화 체제를 갖출 계획이다.

스즈키 가즈토 도쿄대학 교수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지정학적 리스크를 기업 경영에 고려하지 않아도 됐던 지난 수십 년간이 이례적인 시대"라며 "지난 20년간 생산과 소비가 글로벌화했기 때문에 지정학적 위험의 부담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