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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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에서 여성 골퍼들이 전반 9홀이 끝난 뒤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돌아와 후반을 치르는 것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인스타그램 등 각종 SNS에서는 주말 골퍼들이 형형색색 골프웨어를 입고 찍은 사진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몰두하는 스타트업 업계에선 ‘레깅스 출근족’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다. 2020년 코로나19 창궐 전이었다면 어색했을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 국면의 일상이다.

요즘 패션업계의 화두는 ‘애슬레저’다. 애슬레저는 일상복과의 경계를 허문 스포츠웨어를 뜻한다. 코로나19로 불어닥친 골프·테니스 열풍, 재택근무의 일상화에 힘입어 독보적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다. 인구감소 등으로 정체 국면에 접어든 패션 시장이기에 더 두드러지는 흐름이다.

6일 한국섬유연합회에 따르면 올해 스포츠의류 시장 규모는 총 7조1305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지난해 6조4537억원보다 10.4%(6768억원) 불어난 규모다. 같은 기간 7.5% 증가하는 데 그친 전체 의류 시장보다 큰 폭의 성장세일뿐더러 남녀 정장 시장(8조3535억원)도 곧 넘어설 기세다.

소비자들에게 인기 높은 브랜드를 집중적으로 취급하는 백화점에서의 성장 속도는 더 빠르다. 롯데·현대·신세계백화점 등 서울 주요 백화점에서 스포츠 의류 매출은 대부분 전년 대비 30% 넘게 뛰었다.

패션업체들은 너도나도 스포츠 의류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 골프웨어 브랜드 ‘왁’과 ‘지포어’로 대박을 낸 코오롱FnC는 여성복 브랜드 럭키슈에뜨에서 테니스 의류를 최근 새롭게 선보이면서 ‘애슬레저 전선’을 넓혔다. 스포츠웨어 브랜드를 보유하지 않은 게 약점으로 지목돼 온 LF는 아예 ‘리복’ 브랜드 판권을 경쟁사인 코웰패션으로부터 빼앗아 왔다.

패션업계에서는 올해 각종 스포츠 ‘빅 이벤트’가 줄줄이 열리는 만큼 애슬레저 시장의 열기가 한층 뜨거워질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마무리된 데 이어 9월엔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 겨울에는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이어진다.

'요가복도 일상복처럼'…애슬레저 시장 빠른 성장세

국내 애슬레저 시장은 코로나19 창궐 첫해(2020년) 소비심리가 붕괴한 여파로 1조원 가까이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성장세로 빠르게 돌아섰다.

해외여행길이 막혀 대안으로 골프의 인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 ‘첫 단추’였다. 2030 여성 골퍼를 중심으로 인스타그램 등에 화려한 골프웨어를 자랑하는 게 문화가 되면서 ‘스포츠웨어는 1020세대가 조깅·헬스 할 때나 입는 옷’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졌다.

자신감을 얻은 주요 브랜드들은 요가복 등의 카테고리에서 일상복처럼 입을 수 있는 의류를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패션업계에선 “애슬레저가 정장 시장까지 잠식해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 국면에 접어들더라도 구조적 성장세가 이어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시장 규모 7조원 돌파할 듯

6일 한국섬유산업연합회에 따르면 2020년 국내 스포츠의류 시장은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아 전년(6조6544억원) 대비 10.1% 감소한 5조9801억원에 머물렀다. 하지만 지난해 반전에 성공해 7.9% 증가한 6조4537억원으로 불어났다.

올해는 이보다도 10.4% 늘어난 7조1305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 시장이 7조원을 넘어서는 것은 아웃도어 열풍이 한창이던 2017년 이후 처음이다.

한국의 이런 성장 속도는 스포츠웨어 시장이 2021년부터 2025년까지 매년 10% 이상 커질 것으로 관측되는 중국(유로모니터)과 더불어 세계 주요국 중 가장 빠른 수준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따르면 지난해 3066억달러(약 388조원)이던 글로벌 스포츠 의류 시장은 앞으로 연평균 7%씩 성장해 2026년 5439억달러(약 689조원)에 달할 것으로 관측된다.

애슬레저의 인기는 코로나19가 불러일으킨 사회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재택근무의 일상화, 골프·테니스 열풍 등이 맞물리면서 1020세대에 국한돼 있던 주력 소비층이 MZ세대(밀레니얼+Z세대)로 확산한 것이다.

패션업계에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더라도 ‘대세’가 된 애슬레저 열풍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복처럼 입을 수 있는 다양한 스포츠웨어를 선보이며 시장 공략에 몰두하고 있다. 밑단이 넓은 부츠컷 레깅스, 주머니가 달린 레깅스 등이 그런 사례다.

“한국은 애슬레저 실험장”

성장 궤적이 워낙 가파르다 보니 한국은 세계적으로 ‘핫’한 스포츠 브랜드들이 가장 주목하는 국가로 떠올랐다. 지난해 나이키가 서울 명동에 문을 연 4층 규모의 대형 매장은 국내 ‘패피(패션피플)’들 사이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한국은 미국 본사에서도 가장 주목하는 지역”이라는 게 나이키 측 설명이다.

‘레깅스계의 샤넬’로 통하는 룰루레몬도 오는 7월 서울 한남동에 첫 단독 매장을 열고 한국 공략을 가속화한다. 룰루레몬은 레깅스 한 벌에 10만원이 넘을 정도로 고가 브랜드다.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 주요 점포에 11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단독 매장을 선보이는 건 2016년 한국 진출 이후 처음이다. 진출 첫해 청담동에 플래그십 매장을 내면서 강남 소비자의 관심을 끌었던 룰루레몬은 이번에는 강북 부유층을 공략 대상으로 점찍었다. 프랑스 패션 브랜드 이로의 리샤르 페타야 대표는 “한국 애슬레저 시장은 유럽이나 미국보다 훨씬 발달한 글로벌 브랜드들의 테스트 베드”라고 설명했다.

패션업계 최대 격전지

인구 감소 등의 영향으로 국내 의류시장 전반의 사정은 썩 좋지 않다. 2018년 43조2181억원이던 시장 규모는 지난해 40조8783억원으로 2조3398억원(5.4%) 감소했다.

패션기업들 입장에선 이런 와중에 고속 성장하는 애슬레저 시장을 가만히 놔둘 수 없다. 될성싶은 브랜드를 출혈을 불사하고 경쟁사로부터 빼앗아 오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LF는 지난달 코웰패션으로부터 ‘리복’ 판권을 빼앗아 왔다. 패션업계에서 다른 패션 회사의 브랜드를 가져오는 일은 이례적이다. 허를 찔린 코웰패션은 대신 국제축구연맹 ‘FIFA’의 판권을 가져와 오는 11월 카타르 월드컵을 겨냥한 의류를 출시했다.

시장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브랜드들도 리뉴얼해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롯데지에프알이 최근 내놓은 ‘까파’와 ‘까웨’가 그렇다. ‘NFL’ ‘케즈’ ‘오닐’ ‘디아도라’ 등 생소한 브랜드가 속속 나오면서 2020년 이후 출시된 신규 브랜드 수만 10여 개에 달한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