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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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빈 롯데 회장은 백화점, 마트 등 유통 부문에 관한 한 ‘자율 경영’을 보장해줬다. 이인원, 이원준, 강희태 부회장 등 유통 계열사들을 총괄한 대표들에게 사실상의 전권을 줬다. 신 회장이 대표이사로 등재된 곳은 롯데지주 외에 롯데케미칼, 롯데제과뿐이다. 롯데쇼핑의 자율성은 스스로 실력을 증명했기에 가능했다.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매년 매출이 22조원을 넘었다. 2015년에는 30조원에 육박하는 매출을 거두기도 했다. 롯데가 그룹 매출 100조원 고지를 넘보던 시절에 롯데쇼핑은 확실한 주력 ‘선수’였다.

"롯데쇼핑을 '에이스'로 부활시켜라"

‘유통이 제1선발’이라는 롯데의 오랜 공식은 지난해 깨졌다. 지난해 롯데쇼핑의 연결기준 매출은 15조5812억원으로 롯데케미칼(17조8052억원)에 처음으로 역전당했다. 대략 2016년부터 영업이익 등 수익성 측면에서도 화학이 유통을 앞질렀다. 롯데의 축이 유통에서 화학으로 넘어가고 있음은 그룹의 ‘컨트롤 타워’라고 할 수 있는 롯데지주의 인력 구성만 봐도 알 수 있다. 2017년부터 롯데지주 대표이사를 지낸 황각규 전 부회장은 신 회장과 롯데케미칼에서 동고동락한 ‘화학맨’이다. 이훈기 롯데지주 ESG경영혁신실장(부사장)도 케미칼 출신이다. 이 실장은 롯데의 미래전략을 구상하는 핵심으로, 최근 신설된 롯데헬스케어의 대표를 겸임하라는 명을 받았다.

신 회장이 P&G 출신의 김상현 부회장에게 롯데그룹 유통군HQ 총괄대표직을 맡긴 건 이 같은 그룹 내 역학 관계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난해 말 각 계열사 임원 인사를 단행하면서 신 회장은 극비리에 김 부회장을 만났다. 글로벌 유통그룹인 DFI리테일에서 H&B 대표 겸 싱가포르 법인장을 맡고 있던 김 부회장을 직접 만나 롯데 합류를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부회장이 가진 막강한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해 롯데쇼핑의 저력을 끌어올리고, 경직돼 있던 롯데쇼핑의 조직 문화를 신속하고 자유로운 ‘에자일(agile) 조직’으로 바꾸라는 것이 신 회장의 주문이었다고 한다.

김 부회장은 취임 후 조직 문화를 바꾸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관련한 일화 하나가 있다. 가족이 모두 해외에 거주하는 터라 서울 코엑스 인근 오피스텔에서 홀로 사는 ‘자취생’ 김 부회장이 어느 날 나영호 롯데온 대표에게 메일을 하나 보냈다. 내용은 대략 이랬다. “이것저것 사다 보니 품목이 30개가 넘었어요. 그랬더니 결제 에러가 나더군요.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논의해 봅시다”. 온라인 장보기 뿐만 아니라 강남권에 있는 백화점과 대형마트, 편의점 등 유통 부문 계열사 점포를 수시로 찾는다. 롯데쇼핑 관계자는 “기존 CEO들도 현장을 자주 찾기는 했지만, 실제 수요자의 관점에서 피드백을 주는 CEO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김 부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두 가지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객 관점에서 생각할 것, 사내에선 소통을 최우선 가치로 삼을 것 등이다. ‘소통왕’답게 기존 롯데 문화에선 상상하기 어려웠던 과감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취임 직후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공개한 영상 메시지에서 김 부회장은 “샘 킴이나 김상현님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150여 명의 임직원으로 구성된 유통군HQ에선 지난달부터 직급 대신 이름 뒤에 ‘님’자만 붙여 부르도록 수평적 호칭 제도를 도입했다. 롯데 관계자는 “계열사로도 수평적 호칭제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통왕으로 변신한 롯데 유통군의 CEO들

김 부회장뿐만 아니라 롯데 유통 부문 전 계열사의 CEO들도 소통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신세계 출신인 정준호 롯데백화점 대표는 지난달부터 매주 수요일을 ‘모든 곳이 나의 사무실’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일종의 ‘워케이션(일과 휴가의 결합)’ 실험을 진행 중이다. 백화점 전 직원이 본인이 일하기 편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업무를 보도록 권장하는 제도다. 롯데 백화점 관계자는 “평소 업무로 방문하기 어려웠던 전시회나 맛집 등 핫 플레이스를 방문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있다”며 “조직 문화가 확실히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강성현 롯데마트 대표는 ‘보고’ 개념을 없애는 것으로 소통을 활발히 하고 있다. 임원이나 팀장들이 대표 집무실로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대표가 직접 임원실과 팀장 자리로 이동해 토론이나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소통 문화 정착과 함께 김 부회장은 롯데쇼핑을 세련된 조직으로 탈바꿈하는 데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유통 부문에 처음으로 최고마케팅책임자(CMO) 자리를 만들었다. P&G 출신으로 LG전자와 LG생활건강에서 마케팅을 책임졌던 이우경 부사장을 영입했다. 김 부회장은 유통 부문의 최고전략책임자(CSO)를 맡으면서 롯데쇼핑의 부활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P&G와 와튼스쿨 인맥이 김 부회장의 주요 네트워크 기반인 것으로 알려졌다.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은 김 부회장의 P&G 입사 1년 선배다. 한승헌 에르메스코리아 대표도 P&G에서 김 부회장과 한솥밥을 먹었다.

김 부회장을 비롯해 롯데쇼핑의 ‘외인(外人) CEO’들이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오고 있지만, 조직 문화로 정착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유통 부문 대표들이 직면한 가장 큰 ‘이슈’는 수익과 성장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느냐다. 롯데쇼핑은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전년 대비 ‘마이너스’를 면치 못했다. 롯데 관계자는 “김상현 부회장은 내부적으로 적자를 내는 사업은 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새로운 문화를 조직에 자리잡도록 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며 “롯데 유통 부문의 신임 CEO들이 실적 압박을 이겨내며 혁신에 성공할 수 있을 지는 두고봐야 한다”고 말했다.

조직 문화가 급격하게 변하는 것에 대해서도 유통 주요 계열사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화점만 해도 핵심 조직인 상품영업본부를 강남으로 이전하고 신세계, 샤넬코리아 등 외부 출신이 대거 입성한 것에 대해 ‘롯데맨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 롯데 임원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롯데 유통 부문엔 오랫동안 업력을 쌓은 베테랑들이 많다”며 “이들의 의견을 구하고, 롯데의 젊은 직원들을 과감히 발탁하는 인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