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권 쥐는 국민연금 수탁위…"3명이 257개 기업 명줄 쥐는 셈"

자본시장 '무소불위 권력자' 탄생 예고
칼자루 모두 쥐고 '기업 벌주기'…책임 안지는 수탁위, 문제는 구성

“이대로면 국민연금 수탁위(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수년 내에 국내 주요 상장사 경영진의 명줄을 모두 쥐고 흔들 수 있게 된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자본시장의 무소불위 권력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국민연금 산하 위원회에 몸담았던 한 교수의 말처럼 국민연금 수탁위는 매년 영향력을 확대해가며 국내 대표 기업들의 ‘슈퍼 갑’으로 떠올랐다. 수탁위는 2018년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전담하기 위해 설립됐으며 이후 특정 성향의 시민단체와 노동계 주장을 반영해 경영계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 왔다. 다음달엔 국민연금이 투자한 국내 기업에 대한 소송 권한까지 수탁위에 주는 방안이 국민연금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의결될 예정이다.

이런 가운데 국민연금이 지난달 삼성물산 롯데하이마트 등 20여 개 국내 기업에 비공개 서한을 발송해 논란이 더욱 커졌다.

수탁위, 경영 간섭에 전권 갖게 되나

수탁위는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지침)를 도입하면서 2018년 설립된 조직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한 이유가 정치적 외압에 휘둘린 결과라는 지적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세운 공약의 결과물이다.

수탁위는 다음달 열리는 기금운용위에서 ‘국민연금 기금 수탁자 책임 활동에 관한 지침 개정안’이 통과되면 국민연금이 보유한 상장사들에 거의 모든 경영 간섭을 할 수 있는 전권을 갖게 된다. 개정안은 기존에 기업의 배당 방침이나 임원 보수한도 등에서만 ‘비경영참여 주주 제안’을 할 수 있었던 수탁위가 △법령 위반 우려로 기업 가치가 훼손되거나 주주 권익을 침해할 수 있는 사안 △지속적으로 반대의결권을 행사했으나 개선이 없는 사안 △기후변화 관련·산업안전 관련 리스크 대응에 관한 사안 △이 밖에 기금운용위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 등 모든 중점 관리 사안에 주주 제안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할지 말지 결정하는 기구도 수탁위로 일원화된다.

소송 여부를 사실상 3인이 결정

지금도 국민연금은 지분율 5% 이상 기업(257개)에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다만 주체는 기금운용본부다. 경영계 관계자는 “기금운용본부는 투자 전문가로 구성돼 있는 데다 안에 법무팀과 리스크조직을 두고 있다”며 “기금운용본부는 수익률에 책임을 지기 때문에 주가에 미칠 영향과 기업 경쟁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고 했다. 아직까지 국민연금발(發) 주주대표소송이 없는 이유다. 반면 수익률 등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수탁위가 소송을 결정하는 주체가 되면, 수익률과 무관하게 여론이나 정치적 분위기에 따라 소송이 제기될 수 있다고 기업들은 우려하고 있다.

수탁위 위원은 총 9명으로 사용자(경영계)와 근로자, 지역가입자 단체 등이 3명씩 추천한다. 다수결로 결정하는 구조인데, 사용자 측 위원과 근로자 측 위원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경우가 많아 민감한 사안은 사실상 지역가입자 단체 추천 위원 3명이 결정권을 쥐게 된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출신이 이 3명 중 2명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정치적으로 의결권 사용”

기업들은 국민연금이 이미 충분히 주주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중점관리 사안을 정해놓고 기업들이 이를 지키지 못할 경우 비공개대화 기업으로 선정하고, 이후 중점관리 기업, 주주 제안 등으로 이어지는 압박을 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주주 제안 범위를 경영 전반으로 확대하고 소송까지 사실상 노동계·시민단체 손에 맡기겠다는 것은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국민연금의 지배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세계 주요 대형 연기금 중 정부 관료(보건복지부 장관)가 최고 의사결정권을 쥔 곳은 국민연금이 유일하다. 이재혁 상장회사협의회 정책본부장은 “최고의사결정 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를 민간 기금운용 전문가 중심으로 개편해 수탁자 책임과 관련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고, 현행 수탁위는 기금운용위의 의사결정을 위한 자문기구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 주주대표소송

현실적으로 경영에 참여할 수 없는 소액주주들이 일정 지분 이상의 의결권을 모아 집단으로 내는 소송. 상장사인 경우 전체 주식의 0.01%, 비상장사인 경우 1% 이상을 보유한 주주가 소를 제기할 수 있다.

김종우/김재후/고재연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