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섬 창업자인 정재봉 사우스케이프 회장은 지난해 6월 국내시장에 조용히 골프웨어를 선보였다. 2012년 현대백화점에 한섬을 매각한 자금으로 경남 남해에 지은 고급 골프리조트이자 회사명을 브랜드로 활용했다. ‘론칭’ 2년차인 골프웨어 사우스케이프는 올 9월까지 111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해 연매출(36억원)의 세 배가 넘는 실적이다.

특별한 마케팅 없이 온라인몰과 단 하나의 직영 가두 매장으로 올린 깜짝 성적표다. 골프패션업계가 정 회장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는 이유다. 하지만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것이란 관측이 아직은 지배적이다. 한섬을 매각하면서 맺은 ‘의류업 진출 금지’ 조항이 정 회장의 발목을 잡고 있어서다.
'토종 골프웨어' 사우스케이프의 딜레마

토종 골프웨어의 ‘깜짝 돌풍’

30일 백화점 및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정 회장은 사우스케이프를 더 키우기 위해 백화점 입점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백화점들도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빅3’ 백화점인 A사와는 전례없는 방식의 입점협상까지 진행 중이다. 백화점에 매장을 열지만 결제는 사우스케이프 온라인몰을 통해 이뤄지는 구조다. A사로선 자사 매출로 잡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사우스케이프의 잠재력을 그만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사우스케이프의 실력은 지난해 9월부터 3개월가량 현대백화점에서 진행된 ‘팝업’ 행사에서도 입증됐다. 압구정본점과 판교점에서 이벤트 성격으로 임시 매장을 열었는데 월매출이 PXG, 타이틀리스트, 지포어 등과 함께 ‘탑5’에 든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9개월 동안 기록한 매출 111억원에 대해서도 이례적인 성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사우스케이프의 오프라인 매장은 도산공원에 있는 플래그십스토어 단 하나다. 올초 선보여 단숨에 골프웨어 ‘빅3’에 진입한 미국 수입브랜드 지포어만 해도 주요 백화점에 대부분 입점해 있다.

겸업금지 피할 제3의 길 찾을까

사우스케이프는 매출 상위권에 있는 국내 유일의 토종 골프패션 브랜드다. 정 회장은 여성복업계에선 자타공인 ‘대부’로 통한다. 명품 해외 브랜드가 득세하는 패션업계에서 정 회장이 만든 한섬의 ‘타임’은 여전히 백화점이 ‘모셔가는’ 브랜드다. 현대백화점 계열로 편입된 후 규모가 더 커져 지난해에는 여성복 브랜드 중 처음으로 연매출 2000억원 고지를 돌파했다.

정 회장이 겸업금지 계약에도 불구하고 골프웨어를 내놓은 것은 토종 고급 골프브랜드에 대한 열망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사우스케이프(법인)는 지난해 감사보고서에 “골프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아져 골프의류 수요도 다양해지고 있다”며 “골프웨어도 브랜드와 디자인이 핵심 경쟁요소”라고 밝혔다. 남해의 최고급 골프 리조트와 정재봉 브랜드까지 더하면 해외 골프웨어와의 경쟁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난다.

관건은 현대백화점그룹이 정 회장의 활동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이냐다. IB업계 관계자는 “정 회장이 한섬 매각 당시 평생 의류업에 진출하지 않겠다고 계약서에 서명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한섬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겸업금지 조항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자세한 내용은 당사자 간 비밀유지 계약 조건이어서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절(絶)패션’ 계약에도 불구하고 현대백화점그룹이 정 회장의 신규 브랜드 출시를 용인한 것은 신세계, 롯데쇼핑 등 경쟁사를 의식해서라는 관측이 나온다. 한 백화점업계 관계자는 “한섬으로선 정 회장의 창업 동지이자 아내인 문미숙 디자이너가 경쟁사의 적장으로 가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현대백화점과 사우스케이프의 연합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섬은 현재 정 회장 일가(84.01%)에 이어 사우스케이프(법인) 지분 14.51%를 소유한 2대 주주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