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에르메스 매장 전경. /한경DB
국내 한 에르메스 매장 전경. /한경DB
“실적템 6000만원어치 채웠는데 얼마나 더 사야 매장에서 캘리백 구경할 수 있나요?”

가입자 50만여명의 명품 정보 공유 온라인 카페에선 연말이 되면 이같은 에르메스 ‘실적템’ 관련 문의가 수시로 올라온다. 에르메스 실적템은 버킨백·켈리백 등 에르메스의 인기 가방을 사기 위해 먼저 구매해야 하는 비인기 제품을 지칭하는 은어다. 통상 에르메스는 다이어리·담요·바구니 등 소품이나 작은 가구, 그릇, 주얼리 등 선호도가 떨어지는 상품을 4000만~1억원 정도 구매한 고객에 한해 인기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특히 연말이 되면 에르메스 마니아들의 비인기 제품 ‘실적 쌓기’ 열풍이 거세진다. 에르메스는 매년 1월이 되면 가격을 인상하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28일 기준 온라인 카페를 보면 ‘에르메스 실적템을 얼마나 구입해야 켈리백이나 버킨백을 받을 수 있느냐’ 등의 질문이 많이 올라왔다.

답변들은 경험담을 바탕으로 인기 가방 구매법을 조언해주는 글이 대다수다. “2~3주에 한번씩은 매장을 들러 수백만~수천만원어치의 물건을 사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 “매장에서 잘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인 다이어리나 그릇 등을 수시로 구매해 셀러(매장 직원)에게 잘 보여야 한다” “물건을 구매했다가 반품을 하면 구매 실적(점수)이 크게 깎인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에르메스 버킨백. /한경DB
에르메스 버킨백. /한경DB
버킨백과 캘리백은 가죽 종류나 색상 크기 등에 따라 2000만원에서 1억원이 넘는 초고가 가방이다. 이같이 비싼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크게 필요 없는 제품을 1억원어치 가까이 사들이면서 매장 직원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셈이다. 국내 명품시장이 극도의 공급자 우선 시장이 되면서 심화되는 현상이다.

한 명품업체 관계자는 “아침 일찍 매장 앞에 줄을 서고도 원하는 제품을 사지 못할 정도로 명품 공급이 제한되자 소비자들이 명품업체들의 각종 불합리한 요구에도 울며 겨자먹기로 따르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며 “특히 초고가 명품 매장들이 수익 극대화를 위해 제품 공급량을 조절하면서 수급 불안정이 심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업계에 따르면 다음달 초 에르메스 가격 인상 소문이 돌면서 이달 중순부터 에르메스 매장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켈리백을 사기 위해 1년째 실적을 쌓고 있는 박미경 씨(32·가명)는 “최근 매장을 방문했는데 매대가 텅텅 비었더라. 12월 말이 되면서 비인기 제품인 실적템을 포함해 재고가 동난 물건이 많다고 들었다”고 했다.
에르메스의 비인기 제품으로 꼽히는 그릇 상품들. /한경DB
에르메스의 비인기 제품으로 꼽히는 그릇 상품들. /한경DB
에르메스 고객센터에도 제품 보유 문의와 가격 인상률에 대한 문의가 끊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식 쇼핑몰에도 품절이 빠르게 이뤄지면서 제품 판매가 수시로 바뀌면서 업데이트되고 있다. 명품 커뮤니티에서는 제품에 따라 어느 매장에 물건이 있는지 등 정보 공유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에르메스는 코로나19 이전 1년에 1~2차례에 불과했던 가격 인상을 3차례 이상으로 늘렸다. 내년에도 비슷한 분위기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수차례 명품 가격 인상에도 소비는 식을 기미가 없다. 에르메스코리아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시장에서 에르메스 매출은 4191억원으로 전년 대비 15.9%나 늘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