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기하급수 시대의 비즈니스 전환 [정삼기의 경영프리즘]
최근 해외 자료에서 두 가지 흐름이 눈에 띄었습니다. 벤처캐피털(VC) 산업의 등장과 기하급수적인 기술 변화입니다.

벤처캐피털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만, 바로 '산업'이라는 용어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벤처캐피털이 독립적인 산업으로 부상했다"며 '모험자본주의' 시대를 예고했습니다. 몇 가지 간추리자면 이렇습니다.

"세계 시가 총액 10대 기업 중 7개가 벤처캐피털이 없었다면 존재하기 힘들었다. 검색엔진, 아이폰, 전기차, mRNA 백신 성공은 벤처캐피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 벤처캐피털은 미증유의 자금이 몰리며 자본주의 드림머신으로 스케일업과 변화를 거듭하는 중이다. (중략) 이러한 벤처캐피털 성공 방식이 금융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기업공개를 통해 회수된 투자금이 다시 벤처캐피털로 유입되며 펀드 규모가 폭증하고 있다. 연기금, 국부펀드, 기업들이 앞다투어 벤처캐피털 출자를 늘리고 있다. (중략) 올해 딜에 동원된 벤처캐피털 펀드는 약 6000억 달러로 10년 전의 10배에 달한다. (중략) 한때 미국에서나 통했던 벤처캐피털 생태계가 전 세계로 확산되며 올해 딜 중 51%가 미국 바깥에서 일어났다. 벤처캐피털 변방이었던 유럽도 혁신의 본능이 꿈틀대고 있다. (중략) 벤처캐피털은 이제 혁신의 가능성이 엿보이면 산업과 기업 유형을 가리지 않는다."

기하급수적인 기술 증가 역시 새로울 게 없습니다만, <기하급수의 시대(The Exponential Age)>라는 책에서 몇 문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공장, 가로등, TV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움직이는 전기처럼 다양하게 활용되는 범용기술 덕분에 2차산업혁명이 가능했다. 그런 범용기술들이 지금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새로운 단계로 진입 중이다. (중략) 이런 범용기술 개발은 처음에는 더디게 진행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가해할 정도의 극적인 수준으로 출현한다. 지금이 바로 그런 전환의 시기다. (중략) 기하급수적인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 기술이 디지털 생태계를 동력으로 또다른 기술로 진화 중이다. 태양광 전지, 전기 배터리, 유전자 편집, 증강현실, 온라인 비즈니스, 심지어 전통 농업까지 가리지 않는다."

이 두 가지 흐름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기술과 산업, 자본시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국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기술과 산업입니다. 사실 4차산업혁명이라는 화두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반응은 '기술 지상주의자들만의 세계'로, 일자리가 사라지고 생산성 증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게 대세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산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디지털 기술 없이는 생존을 장담하기 힘들게 됐습니다. 심지어 비관론자들마저도 지난 10여 년 동안 기하급수적인 인공지능 기술과 데이터 축적으로 100여년 전 제조업 부흥을 일으켰던 전기 못지 않게 분야를 막론하고 산업 전반적으로 생산성이 증가하고 있음을 시인합니다. 한 때 돈 먹는 하마로 여겨졌던 태양광과 풍력 에너지가 그런 예입니다. 심지어 농업마저도 초격차 성장을 기약하는 프론티어가 되고 있습니다.

기술을 기반으로 한 산업의 변화는 벤처캐피털이라는 금융산업 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과거의 벤처캐피털 세계는 순진무구한 청년들과 일확천금을 노리는 비주류의 무모한 도전이라며 금융권에서 마이너리티 취급을 받아온 게 사실입니다. 밀레니엄 전환기에 광풍처럼 일었던 인터넷 혁명이 버블로 끝나자 그런 시각은 더욱 팽배해졌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며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알리바바, 텐센트 등 신흥 빅테크 중심의 비즈니스 생태계 주도가 그 예입니다. 이런 변화에는 아이폰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아이폰은 손 안에 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움직이는, 플랫폼의 플랫폼으로, 무한 데이터를 쏟아내며 다양한 비즈니스 생태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벤처캐피털이 있었습니다. 벤처캐피털은 밀레니엄 전환기 몽상가들의 공모자가 아닌, 기업 생태계 혁신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본시장입니다. 이젠 스타트업과 성숙기업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기하급수적인 기술 변화로 스타트업엔 지옥 같은 '데스밸리'가 단축되어 다가오게 됐습니다. 한국의 스타트업은 10년이 넘는 빙하기를 거치며 좀비로 화석화되는 게 흔했습니다만, 이젠 무르익은 디지털 생태계 덕분에 5년도 길 정도입니다. (미국은 3년이면 충분합니다.) 이런 변화에 대응하며 발빠르게 변신하는 전통 기업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기업들은 변화의 방향성과 목표에 대한 확고한 신념, 유연하고도 개방적인 기술 수용 자세가 특징입니다. 그리고 여기엔 자본시장의 변화가 있습니다.

벤처캐피털은 스타트업 중심으로, 기업이 성장기에서 성숙기로 들어서면 그 역할을 다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사모펀드는 그 반대로 성숙기업의 구조조정과 금융공학을 앞세운 반면 기술 주도의 혁신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타트업과 성숙기업 간의 생애주기가 좁혀지며, 스타트업의 스케일업과 성숙기업의 비즈니스 모델 재편을 동시에 추구하는 '하이브리드형' 방식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 역시 기하급수적인 기술 변화 시대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모험자본주의 시대엔 모험과 실행에 나설 '반지원정대'가 필요하다. /출처=네이버 영화
모험자본주의 시대엔 모험과 실행에 나설 '반지원정대'가 필요하다. /출처=네이버 영화
디지털 혁명으로 기술과 산업, 자본시장 간 상호작용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기업 가치의 본질도 완전히 변했습니다. 1975년 스탠다드푸어 500지수 기업의 시가 총액 중 무형자산 비중은 17%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2017년에는 84%였습니다. 최근 아마존 등 빅테크는 94%나 차지합니다. 이제 무형자산이 과거 유형자산의 자리를 대체한 셈입니다.

모험자본주의 시대입니다. 인공지능과 아이폰이 출현했을 때 사람들은 지금 같은 세상을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그런 세상을 타성적으로 바라보며 메타버스 같은 새로운 '절대반지'만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여전히 디지털 기술과 전통 산업과 비즈니스 융합은 현재 진행형으로, 아직 가야할 길이 멉니다. 지금은 새로운 '절대반지' 같은 예지력을 가진 간달프보다는 현실적인 모험과 실행에 나설 '반지원정대'가 필요합니다.

* 필자는 PwC삼일회계법인과 KDB산업은행에서 근무했으며 벤처기업 등을 창업·운영했습니다. 현재는 사모펀드 서앤컴퍼니의 공동대표로 있습니다. <슈퍼파워 중국개발은행>과 <괜찮은 결혼>을 번역하였고 <디지털 국가전략: 4차산업혁명의 길>을 편역하였습니다.

정리=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