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을 '프로' '님'이라고 부르면 조직문화도 바뀔까요"
“홍길동 부장님을 홍길동 님이라고 부른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요.” 삼성전자는 지난달 29일 임직원 직급을 간소화하고 직원 간 호칭을 ‘프로’와 ‘님’으로 통일하겠다고 선언했다.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려면 조직 문화를 수평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른바 ‘실리콘밸리식 인사혁신’이다. 삼성전자의 움직임에 대한 반응은 갈린다. “MZ세대의 이탈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견해도 있지만 “호칭을 파괴한다고 갑자기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느냐”는 반론도 상당하다.

“직원들 ‘말문’부터 틔우자”

삼성전자가 ‘님’과 ‘프로’ 호칭을 처음 도입한 것은 2017년이다. 대리, 과장, 차장 등의 기존 직급을 없애고 CL(커리어 레벨) 제도를 도입하면서 이들 호칭을 쓸 것을 주문했다. 효과는 미미했다. 사내망에 동료의 CL등급이 검색됐던 탓이다. 옆 부서와 협업 전 담당자의 이름을 검색해 ‘CL3’가 나오면 옛 직급인 ‘과장님’으로 상대를 불렀다. 새 제도가 시행되는 내년부터는 검색을 해도 상대방의 연차를 가늠할 수 없게 된다. CL을 아는 것은 본인과 인사고과자, 인사팀뿐이다. 내년부터 옆 부서 직원을 부를 때 ‘님’과 ‘프로’ 이외의 대안이 없어진다.

심리학자들은 ‘언어’가 바뀌면 ‘태도’에도 변화가 생긴다고 설명한다. 직원들이 공격적으로 아이디어를 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최은수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은 장유유서 문화가 강해 자신보다 높은 직급의 상사에게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직원이 적지 않다”며 “호칭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허들(장벽)’이 한층 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직급과 호칭 파괴의 원조는 CJ다. CJ그룹은 2000년 1월 부장, 과장, 대리 등의 직급 호칭을 버리고 서로를 ‘~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재현 회장도 ‘이재현 님’이 됐다. CJ 관계자는 “완전히 자리잡았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호칭에서 주던 위계질서는 거의 없어졌다”고 말했다. 반면 자율호칭으로 바꾼 기업들도 공식 회의에선 ‘프로’나 ‘님’으로 부르지만 1 대 1 미팅 땐 여전히 ‘상무님’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많아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가 여전하다는 반론도 많다.

실패 사례도 적지 않아

2000년대 초반부터 10여 년에 걸쳐 이뤄진 대기업들의 호칭 파괴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KT는 2009년, 포스코는 2011년, 한화그룹은 2012년 직원 간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했지만 몇 년 안돼 기존 직급 체계로 복귀했다. 업무 책임이 불명확해지고 다른 회사와 업무를 할 때도 호칭에 따른 혼선이 적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리-과장-차장으로 이어지는 ‘승진 계단’이 사라지면서 직원들의 의욕이 떨어졌다는 분석도 나왔다. 김강식 한국항공대 경영대 교수는 “과거 주요 대기업의 호칭 파괴는 이렇다 할 효과를 내지 못했다”며 “무엇보다 직원들이 제도의 변화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주요 대기업은 ‘절충안’을 선택했다. 직급 제도는 유지하되 빠른 승진이 가능하도록 직급 개수를 줄이는 방식이 2~3년 전부터 대세가 됐다. 팀장급을 ‘PM(프로젝트 매니저)’, 그 이하를 ‘PL(프로젝트 리더)’로 부르는 SK, 매니저와 책임으로 임원이 아닌 직원들의 호칭을 단순화한 현대자동차그룹 등이 대표적이다. SK 관계자는 “다른 부서와 회의를 할 때 상대방의 직급을 염두에 두지 않는 분위기”라면서도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쏟아지는 등 드라마틱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와 스타트업은 예외다. 이들의 호칭 파괴 수준은 대기업과 비교되지 않는다. 창업자인 김범수 의장을 영어 이름인 ‘브라이언’으로 부르는 카카오, 대표를 ‘SJ(김성준 대표)’로 지칭하는 P2P(개인 간 거래) 스타트업 렌딧이 대표적인 사례다. 창업 때부터 이뤄진 문화여서 호칭 파괴에 대한 관리자들의 거부감도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카카오 관계자는 “대부분 직원이 동료의 직급은 물론 이름도 모른다”며 “호칭이나 직급으로 인한 의사소통의 벽은 없다”고 했다.

사업모델과 조직 특성에 따라 ‘온도차’

전문가들은 인사제도와 호칭을 둘러싼 기업 간 ‘온도 차이’를 비즈니스 모델 때문으로 보고 있다. 대규모 인력이 투입되고, 현장 노하우가 생산성을 좌우하는 대형 제조업체에선 ‘연공서열=능력’ 공식이 여전히 유효하다. 정해진 틀대로 오차없이 빠르게 업무를 추진하는 것이 성패를 좌우하는 기업은 상하관계가 명확한 게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디지털 전환으로 전통 대기업에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요구되는 부서가 많아졌다”며 “삼성전자식 인사제도의 방향은 맞지만 모든 부서에 적용해야 하는지는 좀 더 고민해볼 문제”라고 했다.

호칭보다 중요한 것이 조직 문화라는 지적도 나온다. 임원이 정보를 독점하고 직원들에게 업무를 위임하는 일이 드문 기업에선 호칭 파괴의 효과가 크지 않다는 설명이다. 직원들이 회의 자리에서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상사의 직급에 주눅 들어서가 아니라 ‘아는 것이 없어서’란 얘기다. 주요 대기업이 딜레마에 빠지는 대목이다. 한 대기업 인사팀장은 “조직 문화를 바꿔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만 유출되면 타격이 큰 기업 비밀까지 직원들에게 공개할 수는 없다”며 “과감하게 권한을 위임할 수 있는 부서도 많지 않다”고 했다.

송형석/이수빈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