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까지 정보 넘겨라"
생산주기 등 극비사항 제출해야
고객사와 비밀유지조항에 위배
미국 상무부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대만 TSMC, 인텔 등 반도체 기업에 11월 초까지 최근 3년치 매출과 원자재 및 장비 구매 현황, 고객정보, 재고, 리드타임(생산주기) 등 핵심 정보를 제출하도록 요구한 것으로 26일 알려졌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의 병목현상 해결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자칫 한국 반도체 기업의 핵심 정보가 경쟁사에 유출될 가능성도 있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업 영업비밀까지 요구
미 상무부 기술평가국은 지난 24일 게재한 관보를 통해 △국내외 반도체 제조사 △설계업체와의 중간·최종 사용자 등 공급망 전반에 걸친 기업들에 설문조사를 한다고 밝혔다. 23일 백악관이 소집한 반도체 대책회의에 따른 후속 조치다. 마감은 45일 후인 올 11월 8일이다.

설문은 반도체 기업들이 극비에 부치고 있는 영업비밀을 집중적으로 요구했다. 구체적으로 각 기업의 3대 고객 리스트와 예상 매출, 제품별 매출 비중, 리드타임까지 답하도록 하고 있다. 제품의 생산 능력과 주문량이 이를 넘어설 경우 대비책도 제출하도록 했다. 반도체 구매·사용 기업으로서도 민감한 질문인 것은 마찬가지다. 완성차 업체는 반도체 쇼티지(공급 부족)로 인한 생산 차질 가능성을 자세하게 기술하도록 하고 있다.
美, 삼성·하이닉스에 고객명단부터 재고까지 기밀 요구

“공시에도 올리지 않는 내용”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기업들은 난색을 보이고 있다. 미국 정부에 이 같은 내용을 공개할 경우 고객사와의 비밀유지 조약을 깰 뿐 아니라 반도체 가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애플과 테슬라 등 글로벌 기업들은 어느 반도체 기업에 생산을 맡겼느냐에 따라 제품의 종류와 성능, 경쟁력 등이 밝혀질 수 있다. 애플에 부품을 납품하는 국내 기업이 내부 보고서에 애플을 ‘미주향 기업’이라고만 언급하는 것도 고객 비밀 유지가 계약 체결의 핵심 요구 조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회사로선 생산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극비에 부치고 있다. 반도체 생산량을 가늠할 수 있는 수율이 대표적이다. 수율은 웨이퍼 한 장에 설계된 최대 칩(IC)의 개수 대비 생산된 정상 칩의 개수를 백분율로 나타낸 수치다. 업계 관계자는 “수율을 밝히는 순간 해당 기업의 기술력이 그대로 밝혀져 가격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에 설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기업의 재고와 생산능력 등이 밝혀지면 반도체 가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반도체 고정거래가격은 PC 업체 등 주요 고정거래처와의 협상을 통해 장기 계약 형태로 결정하는 공급 가격이다. 만일 반도체 기업이 처리해야 할 재고량이 많다고 알려지면 고정거래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경쟁사에 정보 유출 우려도
국내 반도체업계에선 무엇보다 미국의 이 같은 정보제출 요청이 미국 반도체 기업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인텔이 미국 정부를 등에 업고 파운드리 재진출을 선언한 만큼 삼성전자나 TSMC의 핵심 정보가 인텔로 흘러들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 인텔과 미국 정부는 노골적으로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인텔이 반도체 투자 보조금 유치를 위해 로비에 나섰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업계에선 이 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포함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미 정부의 압박을 피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미 정부는 국방물자생산법(DPA)을 동원해 정보 제출을 강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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