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의 배홍동비빔면이 팔도가 오랜 기간 장악해온 비빔면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배홍동은 출시 다음달부터 ‘난공불락’처럼 여겨지던 팔도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볶음면 시장에서도 신라면볶음면은 오랫동안 1위를 지켜온 삼양식품 불닭볶음면의 독주체제에 균열을 내고 있다. 자신만의 영역을 공고하게 구축해온 식품업계에 최근 동종업계 경쟁자들의 진출이 잇따르면서 시장 판도가 요동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7일 캐시카우의 영수증 데이터 분석 결과에 따르면 팔도비빔면의 구매경험도는 지난 2월 68.3%에서 배홍동비빔면이 출시된 3월 39.2%로 급락했다. 배홍동비빔면의 구매경험도는 출시 첫 달부터 25.2%를 기록했다. 구매경험도는 해당 제품 카테고리의 전체 구매자 중 특정 제품 구매자의 비중을 나타낸 수치다.
팔도비빔면은 구매경험도를 지난달 50.2%까지 끌어올렸지만 배홍동비빔면 출시 이전에 비해선 18.1%포인트 떨어진 상황이다. 배홍동비빔면은 꾸준히 20% 구매경험도를 유지하며 시장 점유율 2위를 달리던 오뚜기 진비빔면을 3위로 밀어냈다. 지난달 기준 배홍동비빔면의 구매경험도는 24.4%로 진비빔면(16.9%)을 7.5%포인트 차이로 앞서고 있다.
지역에 따라 제품 구매경험도에 차이가 난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젊은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세종에선 혼전 양상이다. 6월에는 팔도비빔면이, 7월에는 배홍동비빔면이 구매경험도 1위를 차지했지만 지난달에는 팔도비빔면과 진비빔면이 배홍동비빔면을 따돌리고 공동 선두에 올랐다. 다소 보수적인 인천에서는 지난달 팔도비빔면이 구매경험도 56.9%를 기록하면서 배홍동비빔면(21.6%)과 진비빔면(9.8%)을 크게 앞섰다.
볶음면 시장에선 신라면볶음면이 출시 3주 만에 불닭볶음면을 압도했다. 7월 셋째주 65.6%에 달하던 불닭볶음면의 구매경험도는 7월 다섯째주 24.6%로 쪼그라들었다. 반면 신라면볶음면은 19.8%에서 71.5%로 구매경험도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주춤했던 불닭볶음면이 다시 치고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8월 4주차 기준 두 제품의 구매경험도는 10.7%포인트 차이로 좁혀진 상황이다.
설준희 캐시카우 대표는 “선택지가 넓어지면 소비자는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소비재산업의 ‘1등 공식’이 무너지고 있다. 식품업계가 대표적이다. 그동안 주요 식품회사는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고, 대형마트 등 거대 유통업체와 동맹하는 전략으로 2, 3등의 반란을 철저히 차단해왔다. 하지만 e커머스라는 신유통이 빠르게 성장하고, 비대면 소비의 일상화로 가정 내 장바구니의 주도권이 분산되면서 소비재 각 영역이 춘추전국시대 수준의 경쟁구도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반란의 무대’ 된 e커머스최근 식품산업은 ‘군웅할거’ 시대다. 반란의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는 곳은 네이버, 쿠팡 등이 자리잡고 있는 e커머스다. 탄산수 시장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웅진식품이 대표적이다. 웅진식품은 탄산수 ‘빅토리아’를 내놓으면서 과감하게 ‘온라인 온리(Online Only)’를 선언했다. 대형마트 등 오프라인 시장에선 자본을 기반으로 한 대형 식품업체의 영업력에 밀릴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대신 온라인 유통망을 통해서만 판매하면서 거품을 철저하게 제거했다. 광고비와 유통 마진 등을 빼 판매 가격을 다른 제품의 절반 수준으로 낮췄다. 광고 없이도 소비자들 사이에서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이라는 입소문이 나자 올 2분기에는 월평균 1000만 병 넘게 팔려나가기도 했다. 업계에선 온라인 판매량만 놓고 보면 빅토리아가 전체 탄산수 시장의 압도적인 점유율 1위인 롯데칠성음료의 ‘트레비’를 앞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진라면이 신라면과 1위 쟁탈을 벌이게 된 것도 온라인 판매에 일찌감치 눈을 뜬 덕분이다. 오뚜기는 2018년 사업부별로 쪼개져 있던 온라인팀을 독립 사업부로 격상했다. 전통 유통망에 익숙한 ‘고참 선배’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마음껏 영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기 위한 결정이었다. 새로운 플레이어가 판 뒤집어소비 주도권의 이동도 업계 2, 3위에 기회가 되고 있다. 과거에는 마트에서 장을 보는 가정주부가 소비를 주도했다면 e커머스의 일상화가 된 요즘은 스마트폰을 갖고 있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각자 소비를 즐긴다. 내가 먹고 싶은 라면은 쿠팡에서 알아서 주문해 먹는 시대가 왔다는 얘기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부모 세대가 선호하는 브랜드를 자녀가 따라 좋아하는 ‘소비의 대물림’ 현상도 사라지고 있다”며 “타깃 고객층만 제대로 공략하면 얼마든지 점유율 순위 역전을 노릴 수 있는 시대”라고 말했다.식품업체 간 경계가 무너지면서 신상품이 시장의 ‘게임체인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닭고기 전문 기업 하림이 라면 시장에 진출하고, CJ제일제당은 ‘안 하는 것 빼고 다 하는’ 종합식품기업이 됐다. 동원F&B의 독무대였던 상온죽 시장은 2018년 말 CJ제일제당이 ‘비비고죽’을 들고나오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파우치 형태의 비비고죽 등장 전까지 상온죽 시장은 작은 플라스틱 단지에 담은 용기죽이 대세였다. 용기죽은 별도의 그릇에 담을 필요 없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긴 살균 과정에서 쌀알과 건더기의 식감이 흐물흐물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CJ제일제당은 2018년 4.3%에 불과하던 상온죽 시장 점유율을 1년 만에 33.1%로 키웠다. 지난해 말에는 동원F&B를 꺾고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수제맥주도 비슷한 사례다. 수입맥주의 대체재를 넘어 국산맥주 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편의점 CU에서 판매하는 ‘곰표 밀맥주’는 지난 5월 오비맥주의 카스, 하이트진로의 테라 등을 제치고 전체 매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수제맥주의 등장으로 가정용 맥주시장이 전환점을 맞이했다”며 “앞으로 시장 점유율 1위 카스의 경쟁자는 하이트도, 테라도 아닌 수제맥주”라고 말했다. 디지털 마케팅도 순위 역전의 원동력광고 및 마케팅 수단의 다양화도 소비재산업 지각 변동의 원인으로 꼽힌다. ‘광고에 스토리와 스케일을 담는다’는 모토로 디지털 마케팅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돌고래유괴단이 대표적이다. 공유 등 유명 연예인까지 등장시키며 업계의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다.달라스튜디오가 제작하는 유튜브 콘텐츠는 적은 돈으로 대박을 낼 수 있는 마케팅 플랫폼으로 각광 받고 있다. 프랜차이즈업계 관계자는 “BBQ가 네고왕이라는 유튜브 마케팅 콘텐츠에서 900만 명에 가까운 조회 수를 기록했다”며 “2, 3등이 저비용으로 입소문을 통해 소비자들을 끌어올 수 있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광고업계에선 ‘덕션’(프로덕션의 줄임말)의 창의력이 기존 광고산업을 뒤흔들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박종관/박동휘 기자 pjk@hankyung.com
캐시카우 데이터의 가장 큰 경쟁력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이뤄지는 개별 소비자의 구매 행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월평균 20만 명(누적 사용자 약 100만 명)이 제공한 영수증을 분석해 개별 상품에 대한 유통 채널별, 지역별 소비 현황을 한눈에 보여준다. 빅데이터 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는 카드회사들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소비패턴의 ‘미싱 링크’를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다.데이터에 기반한 구매 행태 분석은 꾸준히 진화해왔다. 신용카드 회사가 대표적이다. 비씨카드 등은 카드 사용처 등에 대한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상권 분석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의 관광 정책 수립용으로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다. e커머스 업체도 기업 간 거래(B2B) 데이터 사업에 적극적이다.하지만 기존의 소비 관련 데이터는 개별 소비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품목을 선호하는지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반면 캐시카우는 오프라인 매장에서 이뤄지는 개인의 장바구니를 품목별로 분석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구매경험도, 제품충성도, 구매주기뿐만 아니라 A 상품을 살 때 무엇을 같이 사는지를 보여주는 동시 구매, 연관 구매 등의 차별화된 데이터를 제공한다. 설준희 캐시카우 대표는 “공급자 시각이 아니라 소비자의 구매 관점에서 타깃형 마케팅 전략에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라고 설명했다.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국내 면(麵) 시장에 지각변동 바람이 거세다. ‘2등의 반란’이 원인이다. 오뚜기 진라면이 농심 신라면의 30년 아성을 무너뜨릴 기세다. 농심 배홍동은 비빔면계 절대강자인 팔도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소비, 2030세대가 중심이 된 가치소비 구매 행태 등이 소비재 시장의 1등 공식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7일 한국경제신문과 영수증 리워드 앱 ‘오늘뭐샀니’의 운영사인 캐시카우가 지난 1~8월 약 1200만 개(누적 기준)의 개별 소비자 영수증을 분석한 결과 제품충성도에서 처음으로 진라면이 신라면을 앞섰다. 8월 진라면의 제품충성도는 66.8%로 신라면(64.3%)을 제쳤다. 올 1월부터 진라면은 충성도에서 신라면을 앞선 뒤 엎치락뒤치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매출에서 30년간 1위를 지켜온 신라면이 제품충성도에서도 당연히 앞설 것이란 선입견을 깨는 결과다. 비빔면의 절대강자인 팔도도 1위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농심 배홍동의 출현에 구매 빈도가 평균 20% 이상 하락했다. 오비맥주 하이트진로 소비자의 구매 경험 역시 수제맥주의 진격에 올 들어 반토막 났다. 제품충성도는 일정 기간 소비자가 다른 제품은 사지 않고 오로지 한 회사의 특정 제품만 산 비중을 말한다.설준희 캐시카우 대표는 “개별 소비자의 장바구니를 데이터로 분석했더니 기존 통념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며 “라면뿐 아니라 다른 소비재 영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전문가들은 전통 강자의 운명을 가르는 핵심 요인으로 변화 대응력을 꼽고 있다. 오뚜기는 창립 50주년(2019년)을 앞두고 유통 환경이 온라인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자 온라인사업부를 회장 직속으로 신설하고 적극 대응에 나섰다. 반면 농심은 브랜드 인지도에 기댄 채 대형마트 중심의 영업 관행을 고집했다는 지적이 나온다.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시장이 세분화되고 소비 문화가 급변하면서 전통적인 히트상품이 위력을 발휘하던 시장의 법칙이 깨지고 꼬리에 있는 틈새상품의 힘이 세지는 ‘롱테일’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말했다.박종관/박동휘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