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표란 이름부터 지우자"…75년 장수 식품기업의 변신
식물성 발효 조미료 연두, ‘전지현 카레’로 불리는 티아시아키친 커리, ‘다니엘 헤니 파스타’라는 별명이 붙은 폰타나…. 이들의 공통점은 샘표식품이 운영하는 브랜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아는 소비자는 많지 않다. ‘간장업체’란 꼬리표를 떼기 위한 샘표식품의 의도된 마케팅 전략의 결과다.

올해 창립 75주년을 맞은 대표적인 장수 식품기업 샘표식품이 변화를 꾀하고 있다. 변신을 주도한 인물은 3세 경영인 박진선 사장(71)이다. 그는 아낌없는 연구개발(R&D) 투자와 명민한 마케팅 전략으로 샘표식품을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샘표란 이름부터 지우자"…75년 장수 식품기업의 변신

의도적인 ‘샘표 지우기’

1954년 등록된 샘표는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브랜드다. 하지만 최근 샘표식품이 내놓는 신제품에선 샘표라는 브랜드를 찾아보기 어렵다. 제품을 뒤집어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업체명을 확인하지 않으면 샘표 제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넘어갈 정도다. 샘표식품이 ‘샘표 지우기’에 나선 것은 누구에게나 간장을 곧장 떠올리게 하는 샘표의 지나치게 강한 브랜드 이미지가 샘표식품의 사업 확장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샘표는 캔커피 시장에 도전했지만 샘표의 간장 이미지가 워낙 강한 데다 커피의 검은색이 간장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커피에서 간장 맛이 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를 반면교사 삼은 샘표식품은 투 트랙 브랜드 전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간장 등 장류 제품은 샘표 브랜드를 내세우지만 이외 제품군은 별도 전문 브랜드를 만들어 샘표보다 강조한다. 올초 아시아푸드 전문 브랜드 티아시아키친의 커리 신제품을 선보일 때도 샘표 브랜드 정체성을 숨겼다. 제품 패키지는 수입 제품처럼 보이도록 했다. 전지현 씨를 광고모델로 기용한 티아시아키친의 커리는 주부들 사이에서 ‘전지현 카레’로 통한다. 샘표식품의 서양식 전문 브랜드 폰타나는 ‘다니엘 헤니 파스타’라는 별명이 붙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샘표 지우기 전략 때문에 티아시아키친과 폰타나를 수입 브랜드로 알고 있는 소비자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R&D 중심의 종합식품기업

샘표식품의 이 같은 마케팅 전략을 주도하는 인물은 박 사장이다. 1997년 그가 취임할 당시만 해도 샘표식품은 대형 양조장을 갖춘 간장공장 수준이었다. 경영을 맡은 박 사장은 사내에 영업·마케팅 조직을 신설하고 간장 너머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R&D에도 힘을 실었다. 서울대와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뒤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학자형 CEO’로도 불리는 박 사장은 취임 초기부터 줄곧 R&D를 강조했다. 샘표식품의 지난해 매출 대비 R&D 투자 비율은 3.5%에 달한다. 국내 대형 식품업체 평균인 1%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시장의 패러다임을 뒤흔든 식물성 발효 조미료 연두 같은 제품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아낌없는 R&D 투자 덕분이라는 분석이다. 콩을 발효해 만든 연두는 화학조미료 일색이던 업계에 식물성 조미료라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두는 국내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에서 연두의 별명은 ‘매직 소스’. 샘표식품에 따르면 연두의 지난해 미국 아마존 매출은 전년 대비 네 배 가까이 늘었다. 지난 4월엔 오랜 연구 끝에 신개념 소스 브랜드 새미네부엌을 선보였다. 김치와 장조림 등 손이 많이 가는 밑반찬의 조리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제품이다.

간장 밖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는 데 성공한 샘표식품의 실적은 큰 폭으로 개선됐다. 샘표식품은 지난해 매출이 3189억원으로 전년 대비 13.6% 늘었다. 영업이익은 428억원으로 38.1% 증가했다. 간장회사란 꼬리표도 확실히 뗐다. 올 상반기 기준 샘표식품의 장류 외 매출 비중은 49.2%에 달했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